괴테가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 찬사를 보냈던 단테의 <신곡> ‘연옥편 제 9곡’을 보면, 신실했던 그리스도인 ‘루치아’의 안내로 연옥입구에 도착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입구에 있는 ‘세 개의 계단’을 발견합니다.
그 ‘세 계단’은 각각 얼굴이 비칠 만큼 투명한 흰색, 좌우로 금이 가 있는 검정, 그리고 동백꽃보다 더 짙은 붉은 색이었습니다. 투명한 흰색계단은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행위, 옆으로 금이 가 있는 검은 계단은 죄악으로 균열된 영혼의 상처, 붉은 색 계단은 죄에 얼룩진 영혼을 씻겨 정화시켜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 듯 보입니다.
두 사람이 이 계단을 지나자, 그 앞에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문지방에 ‘칼을 들고 앉아있는 천사’를 보게 됩니다. 순간 단테는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라고 외치며 가슴을 ‘세 번’ 칩니다. 단테가 외친 이 ‘세 마디’ 라틴어는 ‘제 탓입니다. 제 탓입니다. 제 큰 탓입니다’라는 참회의 외침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들고 있던 칼로 단테의 이마에 ‘죄’를 의미하는 라틴어 ‘페카툼(peccatum)’의 첫머리 ‘p’를 7개나 새겨주는데, 그것은 영혼을 오염시키는 교만, 질투, 분노, 게으름, 탐욕, 탐식, 정욕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단테가 연옥을 지나면서 7개의 죄를 진 이유로 연옥에서 머물고 있는 영혼들을 만나면서 점차 자신의 악함을 깨달아 참회할 때마다 이마에 새겨져 있던 ‘7개의 p자’가 하나씩 지워지고, 결국 천국의 입구에 섰을 때는 하나의 p자도 없는 맑고 가벼운 영혼으로 서 있게 됩니다.
물론 이 부분은 분명 신학적 오류(誤謬)가 있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단테가 외친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라는 ‘세 마디’가 귓가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서로 멸시’와 ‘서로 증오’라는 감정으로 인해 ‘서로 갈라짐’이라는 ‘삶의 분단’을 맞이하게 된 원인이 “메아 쿨파” 곧 “제 탓입니다”라는 ‘삶의 주어(主語)’를 잃어버린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내 탓이오’가 아닌 ‘네 탓이오’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타인의 불행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병적 감정’을 의미하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즐기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인간은 타인의 불행에 굶주린 존재”라는 말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누구도 이 시대가 축가(祝歌)보다 애가(哀歌)에 더 어울리는 암울한 삶이며 ‘원망’과 ‘갈등’을 분출하는 ‘분화구(噴火口)’ 위에 사는 듯 위태롭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메아 쿨파”의 복원(復原)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적지 않음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단테가 천사 앞에 놓인 세 개의 계단을 보고 자신의 악을 깨달아 외친 “메아 쿨파”가 그대의 일상이 된다면 그대 삶에 ‘예상 못한 작은 행복’이 하나 더 추가될 것이며, 이 대지는 ‘갈등과 다툼의 면적’이 지금보다 훨씬 축소되고 ‘미소와 감사의 면적’은 상상 이상으로 확장된 ‘행복 공간’으로 탈바꿈될 것입니다.

문득 혹 오늘 새벽 산에 오르신다면 ‘야호’라는 평범한 외침을 잠시 접고 “메아 쿨파”를 외쳐보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그 외침이 퍼지는 곳곳에 분명 용서와 화해라는 ‘신의 선물’이 싹틀 것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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