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지극히 가치 있는 것은 모두 간절하게 정성을 다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한 사람에게만 기쁜 꿈, 어떤 집단에게만 유익한 법, 어느 한 나라에게만 좋은 세상,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희망인 그것, 그런 세상, 그런 날은 간절하게 꿈꾸고, 노래하고, 기다리고, 정성을 다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지 싶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그런 마음일 테지요.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대치하며 언제 터질지 모를 전쟁의 공포에서 위축되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핵을 없애고 평화롭게 왕래하는 날이 오기를, 남북이 만나고 북미가 만나서 이 모든 죽음의 기운들을 없애는 복된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미정상회담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에 우리는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어느 시인이 “그날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는다…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야 그날은 온다”고 노래했지요.
중용 23장에도 비슷한 의미의 구절이 나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남을 감동시키고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어쩌면 지극히 간절하여 땀이 피가 되도록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하나님의 길을 의미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꽃을 피우는 순간마다 그렇게 누군가의 눈물과 땀과 피가 소진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희망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고 말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얼버무리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질량은 변하지 않고 보존되듯이, 열이나 에너지도 그러하듯이, 누군가의 피 흘림이 없으면 어떤 죄 사함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하늘의 이치겠지요. 인류의 구원이라는 ‘그날’을 위해 아무 죄 없는 어린 양 예수의 희생이 있어야 했던 것처럼, 간절하여 정성을 다한 하나님의 시간이 필요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절망하더라도 또 일어나서 간절하게 희망을 품습니다. 내가 무엇 하나 잘못하면 일이 그르칠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며 기도합니다.

시간과 정성을 드려 그날을 빚어내는 것. 숲속 나무들도 그렇게 오랜 시간 자란다고 합니다. 하늘을 향해서 시간과 정성을 드려 ‘느리게’ 자라는 나무들을 이번호 특집 ‘숲을 만나다’를 준비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협력하며, 속도를 조절하며 평화의 공존을 이루는 ‘숲’처럼 이 땅도 아름다워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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