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체험하고 느끼는
몸이 안 좋았던 아빠의 건강을 위해 엄마와 함께 고향에 내려왔던 혜원.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엄마와 혜원은 고향에 그대로 머뭅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던 엄마가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혜원은 거기에서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그러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남자친구와 함께 임용고시를 준비하지만, 안타깝게도 떨어집니다. 시험에 붙은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어색해진 데다가, 오랜 서울 생활에 지친 그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시작해요.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옆에는 대기업을 박차고 내려와 부모님 과수원에서 일하며 농촌 생활에 만족해하는 재하, 반면 농협에서 일하는 은숙은 어떻게 해서든 거길 떠나고 싶어 합니다. 어릴 적 친구였던 이 둘과 함께 혜원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수다 떠는 게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거기엔 사건도, 다툼도, 긴장도 없어요.
‘배고파서’ 고향에 왔다는 그녀의 말마따나, 그저 혜원의 ‘먹방’ 농촌 생활을 꼼꼼히 훔쳐봅니다. 배추국·콩국수·꽃파스타·시루떡·아카시아꽃 튀김·밤조림·양배추 샌드위치 등. 그러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이 흘러갑니다. 혜원과 마찬가지로 각종 인스턴트·가공음식에 찌들어 지내던 관객들은 이런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담백한 자연 속으로 푹 빠져듭니다.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보고 즐기는’ 영화가 아닙니다. ‘체험하고 느끼는’ 영화예요.

주변의 소음을 싹 걷어내고
다양한 야채로 영양소를 섭취하기보다는 비타민 알약 하나로 그걸 대신하려는 현대인처럼 밀도 있는 뭔가를 바라는 입장에선, 이 영화는 지나치게 심심하고 느슨합니다. 맵고 짠 맛에 길들여져 섬세한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 앞에 내놓인 평양냉면 같다고나 할까요?
우리의 입맛이 인위적인 가공식품에 길들여졌듯이, 우리의 머리 또한 작위적인 서사, 즉 플롯이 있는 이야기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서사 과잉에 빠져, 늘 사건과 사고가 이어져야 얘깃거리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지 늘 타인과의 관계에 신경 쓰고, 유독 남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도 종종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로 살며, 그저 수단으로 소비되기 마련입니다. 내가 남을 그렇게 소비하듯, 나 또한 타인들에게 똑같이 소모되지요. 그렇기에 늘 우리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가 정체성을 대신합니다. 어디에 사는지, 뭘 입었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얼마나 버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이 말이죠. 그런데 <리틀 포레스트>는 그런 주변의 소음을 싹 걷어내고, 자신을 돌아보는 주인공 혜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빈속에 무엇을 담느냐가 더 중요
그래서 혜원이 얻은 것은 뭘까요? 그녀의 영화 속 대사 그대로 ‘도시를 떠나온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후자는 전자와 명확히 다릅니다. 전자가 ‘도시’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거기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고향’을 먼저 생각하며 원래의 것을 되찾는다는 뜻이죠. 전자가 도피라면 후자는 회복입니다.
내 안을 비우는 것보다 그 빈속에 무엇을 담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고, 그저 잘못을 안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혜원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본인의 눈으로 자신을 찾아갑니다.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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