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람이 온다’는 ‘자서전 쓰기학교’에서 만난 소중한 이야기들을 담는 코너입니다.

J에게.
나는 벌써 마흔여덟이 되었다. 올해 나는 네 번째 개띠 해를 맞았다. 초조함은 사십 줄에 들어서면서 줄곧 따라다녔다. 무엇 하나 해놓은 건 없고, 나이를 더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래저래 갚아야 할 빚만 더 늘어나니 이제는 새해를 맞는 일조차 두렵다.
대학생이었을 때,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은 늘 우리 손바닥 안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시절, 그 믿음이 너무 커서일까 눈앞의 현실을 보지 못했다.
너는 늘 시위현장에서 살았고, 나는 선교단체의 멤버로 몰두하여 살았다. 네가 수배자가 되어 걸인처럼 살아가던 그 여름에, 나는 농촌으로 들어가 무전여행을 하며 전도를 하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야 나는 네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너의 감방에 면회조차 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나는 어느 불교 대학에서 천 명 가까운 선교단체 회원들과 여리고성을 돌듯 탑돌이를 하며 그 대학의 상징인 탑이 무너지기를 기도했다. 어딘가에 쫓기듯 나는, 아니 우리 선교단체의 회원들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처럼 너와 나의 ‘현장’은 달랐으나 우리는 모두 좋은 세상을 꿈꾸었고, 그 세상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손을 뻗으면 잡을 것 같은 세상이었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은 뒤엔 서로의 소식조차 자주 묻지 못할 만큼 우리는 직장생활에 몰두하였다. 결혼식장에서 만났을 때 반가움에 악수를 하고 “자주 만나자”는 뻔한 약속을 했지만 우리는 그 다음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을 때까지 또 서로를 잊었던 모양이다.
가끔 그렇게 만나서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학시절에 나눈 대화의 주제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너는 정치판의 뒷이야기를 전해주었고, 너의 이야기에 나는 개콘을 보듯 낄낄 웃었다. 그때 나는 너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아마도 내가 일하는 직장이 이동통신 시장이었으니 그 판의 비전을 ‘세계선교’처럼 떠들지 않았을까?
그 무렵 나는 이동통신 시장의 태풍에 휩쓸려서 주일예배조차 자주 빠졌는데, 어느 날 어머니는 이렇게 변해버린 내 모습을 보면서 “그러다가 장사를 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하고 경고하셨지. 나는 어머니의 그 ‘장사’라는 표현이 낯설어 한참 대답을 못했다. 아니 내 직장의 숭고함을 허물어뜨리는 천박한 표현이어서 놀랐는지 모르겠다.
네가 한때 야당이었다가 여당이 된 정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할 때, 내게 후원회 일을 도와달라고 이야기했지? 나는 두 마음으로 감사했다. 하나는 나라를 바꾸겠다던 네 꿈이 이뤄질 것 같아서였고, 또 하나는 네가 먼저 도달한 어떤 세계가 내게도 필요한 어떤 힘이라 생각해서였다. 내가 누구보다 더 열심히 너를 위해 일했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있던 그 또 하나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그랬을 게다. 그 와중에도 나의 이동통신 시장은 더욱 비대하였고 이 시장이 만들어준 나의 비전도 끝 간 데를 모르고 비대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골목에서 밤이 늦도록, 그 비대해진 외부의 환경이 정작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를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토로하였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어느 주교의 무덤에 이런 비문이 있다고 한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의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가장 먼저 변화시켰어야 했던 것은 ‘나 자신’이었음을.”
가끔 교회에서 청년들과 만나면 그들은 겁 없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한다. 나는 가소로움을 느끼기보다 애처롭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주목하지 못한 채, 아니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하지 못한 채, 크고 멀리 내 눈을 두었던 그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그 모순의 삶을 누군가 반복하고 있어 또 안타까웠다.
존경하는 스승님이 새해를 맞으며 보내주신 글귀 봉몽의생(鵬夢蟻生, 꿈은 원대하게 품고 생활은 개미처럼 하라)을 벽에다 붙이면서 나는 비로소 ‘봉몽’(鵬夢)을 새로이 한다. 그리고 ‘의생’(蟻生) 곧 실천의 수단에 더욱 매진하리라 다짐해본다.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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