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람이 온다’는 ‘자서전 쓰기학교’에서 만난 소중한 이야기들을 담는 코너입니다.

1
문득 C가 떠오른 까닭은 간밤에 눈이 내려서일지 모른다. 그리고 시 한 구절이 누군가로부터 배달되어서인지 모른다.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정현종의 ‘시, 부질없는 시’ 중에서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아름다우면 될 일이다. C라면 이런저런 클리셰이(cliche), 진부하거나 판에 박은 표현들을 훌훌 털어버린 채 묵묵히 제 걸음을 재촉했으리라, 생각했다.

2
우리는 모일 때마다 우리 모임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그 의미에 부응하여 활동하고 있는 서로를 격려해주었다.
“형은 어르신들의 신임을 받고 계시잖아요. 형이 아니면 우리 모임의 구심점이 흐려질 거예요.”
회장이 된 친구가 내게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공을 사양했다.
“아니다. 네가 회장으로 탁월한 식견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 모임이 그나마 방향을 잡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네 덕이 크다.”
“맞아요. 회장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 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어요.”
또 한 친구가 내 말을 공감해 주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회원들이 제 생각을 지지해주지 않으면 제가 무슨 수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새 회장이 온 이후 우리 모임에는 그동안 잘 나오지 않던 회원들이 한두 명씩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었고, 회원들은 새 사업에 참여하여 제각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협조했다. 나 역시 모임이 새롭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 들떠 있었다. 우리 모임이 탄력을 받아 성장할 경우 우리는 모두 우쭐해질 것이다.

3
C는 우리 모임의 경계선쯤에 걸쳐 있는 존재였다. C는 우리 모임에 대해 별 애착이 없어 보였고, 자신의 시간이나 정성을 굳이 쏟으려 하지 않았다. C는 함께 모일 때도 말이 거의 없었고, 자신의 의무를 최소화하였다. 그런 C의 행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얌체처럼 인식됐다.
“결속력을 다지려면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한 회원은 C를 겨냥한 게 분명해 보였다. C의 말을 기다린 듯 회장이 된 친구가 말했다.
“선을 긋는다는 건 회원의 자격을 두자는 말씀인데, 옳은 말씀입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때 누군가 열외가 되면 동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니까요.”
“의무를 강화하여 비협조적인 회원은 제명하도록 합시다.”
이런 대화들이 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C는 제명됐다. 선을 그으려 했으나 아예 선을 오려버린 셈이었다.
C가 사라진 뒤 우리 모임은 더욱 일사불란했고, 회장의 영향력은 더욱 두드러졌다. 우리는 모임 위주의 존재로 변해 갔다. 가족도 우리 모임 속으로 흡수되었고, 연애 중이던 친구들은 모임으로 연인을 흡수하든가 그렇지 않을 경우 이성친구와 선을 그었으며, 직장보다 모임이 우선이었으므로 직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경계인’이 되어 갔다. 이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경우 의무를 다하지 못한 회원이 되어 모임에서 제명되었다. 몇 사람이 C가 잘린 이후 모임에서 잘려나갔다. 그럴 때마다 회장과 회장을 지지하는 회원들은 모임의 구심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4
그러던 어느 겨울에 문득 눈이 내렸고, 이메일을 통해 시 한 편이 배달되었으며, 잊은 지 오래된 C의 얼굴이 떠올랐다. C는 우리 모임을 떠나서도 시를 쓰듯 깊고 고요한 삶을 살아갈 친구였다. 누군가의 지지와 격려를 받지 않고서도 스스로 빛날 줄 알았다.
오늘 배달된 시를 읽는 순간 어이없게도 나는 격려, 합심, 성공, 발전, 우선순위, 집중, 최선, 선택…, 그런 우리 모임의 단어들이 진부해져버렸다. 이런 클리셰이가 나의 삶을 한 편의 시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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