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가장 익숙한 악기
걸 그룹 가수들의 노래를 피아노로 칠 수 있다면 기분이 얼마나 좋겠느냐는 부추김에 넘어가 몇 달 전부터 큰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악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피아노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악기 구입비, 악보 값, 레슨비, 발표회 비용, 꽃다발 값, 의상비, 유학비, 교통비, 음반 제작비, 홍보비 등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은 꿈도 못 꿀 밑지는 장사다. 그런데도 옆집, 앞집, 뒷집 불문하고 다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시킨다.

콩쿠르의 분위기
사용 영역이 넓으면 시장이 커지고, 시장이 활발해지면 경쟁이 치열해진다. 여러 대회가 있겠지만 가장 치열한 음악 경연장은 분명 피아노 콩쿠르다. 가장 작은 지역 단위의 대회이기는 하지만 큰아이 덕분에 소위 콩쿠르라고 하는 경연의 분위기를 살짝 경험할 기회가 생겼다. 준비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니 일단 콩쿠르에 참여하는 연주자는 상당 기간 정해진 곡에 몰두해야 하고 무한 반복 연습한 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연주곡에 감정을 실어 해석할 줄도 알아야 했다. 무대에 섰을 때 긴장감을 다스릴 수 있는 저마다의 노하우도 깨우치고, 거추장스럽지 않으면서도 깔끔한 느낌이 드는 옷도 마련해야 했다.

콩쿠르 당일, 참가자들은 자신의 차례가 되면 넓은 무대 위로 살얼음판을 걷듯이 나와서 육중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연주회이면서 동시에 경연이서인지 내 시선은 심사위원들에게도 쏠렸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은 시간이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몸짓과 표정 모두 심드렁했다. 같은 곡을 매번 되풀이해서 들어야 하니 지겨울 만도 했다.
그런데도 심사위원들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참가자들의 실력을 알아보는 듯했다. 내가 듣기에는 다들 고만고만한데도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매기는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애써 응원 온 꼬마 연주자들의 부모, 더 나아가 친인척들이 너무 무안하지 않을 만큼만 시간을 준 다음 종을 울려 연주를 마치게 했다. 연주자와 청중 모두의 감정 상태를 한 순간에 칼로 잘라 버리는 느낌이었다.
연령대별 연주가 끝나면 즉석에서 입상자 발표가 이어지고 참가자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것으로 콩쿠르는 마무리되었다.

예술을 하는 이유
나는 왜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은 것일까?
소설 <꿀벌과 천둥>에서 콩쿠르의 진면목을 발견하며 그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일본 하마마쓰시에서 실제로 3년마다 열리는 대회이다(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대회 우승을 차지한 바도 있다).
소설 속에서 내가 응원하는 인물은 다카시마 아카시.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 모인 콩쿠르에서 그는 직장인으로 일하다가 다시 연주를 하게 된 이십대 후반의 가장이다. 참고로 콩쿠르에는 나이 제한이 있어서 그에게 이번 콩쿠르는 평생의 마지막 무대가 될 수도 있다.
그를 통해서 인간이 ‘예술을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가늠할 수 있었다. 고상한 음악가여야 하는가, 평범한 사람의 음악도 멋지지 않을까? 오로지 음악을 위해서 사는 사람만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인가? 아마추어 음악은 음악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에 못 미칠까? 훌륭한 음악가가 평범한 곳에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질문의 끝에 이르니 천재는 오히려 아마추어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들은 음악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프로는? 그들은 지난한 노력을 애써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통조차 만끽할 수 있을 때 다가오는 크나큰 환희를 기대하며! 그렇구나, 아마추어건 프로건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완벽한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P.S. 콩쿠르 연주곡을 유튜브로 찾아가며 소설을 읽는 재미가 그만이다. 하지만 음악을 모르더라도 소설을 읽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책으로 읽는 재미있는 음악 쇼! 피아노 콩쿠르 이야기인데 왜 꿀벌이 날아다니고 천둥이 치는지는 책을 읽으며 직접 확인해 보시길.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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