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돌, 이 날은 개신교 곧 개혁하여 새롭게 된 교회들의 생일인 셈이다. 이처럼 서린 뜻이 깊고 소중한 날에 이 땅의 교회들도 이런저런 모습으로 다양하게 이 해를, 이 날을 축하했다.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 있는 루터를 책과 음악과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었으며, 다양한 학술대회도 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개혁’을 통해 그 뜻을 새겨보려는 캠페인도 진행됐다.
<아름다운동행> 11월호는 10월 29일 종교개혁기념주일과 10월 31일 종교개혁 500돌을 기념하면서 열린 그 많은 행사들 중 두 개를 골라 그 중심을 담아보려고 한다. 루터교회가 중심이 되어 일산 킨텍스에서 개최한 “2017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와 신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시민운동가, 예술인 등이 함께 숭실대 한 강의실에 모여서 만든 학술 모임 “나의, 우리의 종교개혁 생각”이다. - 편집자 주


루터교 주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


먼저 한국 교회의 500돌 생일을 기념하는 성격의 루터교 기념대회는 루터교회가 큰 비용과 인력을 투입해서 1년, 멀게는 2년 가까이 준비한 행사였다. 주요 교단들을 소개하는 부스와 교회 개혁의 의미를 담은 부스들로 ‘개혁 박람회’를 마련하고 연합 예배와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28, 29일 이틀 동안 성대하게 펼쳐졌다.
연인원 1만 명이 참여한 이 행사는 한국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행사로 행사의 성격과 정신 또한 개혁으로 하나 되는 데 맞췄다.
행사를 이끈 루터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 담당자인 원종호 목사의 말처럼 “루터교회가 이번 기념대회를 마련하면서 종교개혁의 유산을 함께 나누고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특히 개혁이라는 큰 숙제 앞에서 끙끙 앓고 있는 한국 교회를 향해 루터교 김철환 총회장이 던진 짧은 설교는 이 대회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으로 평가된다. 김 총회장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뒤 달라진 모습을 담은 누가복음 19장 1~10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니 사람이 보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기쁜 날 저는 여러분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교회 개혁 500주년 연합예배로 모인 우리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 합니다.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칭호와 정의는 많습니다. 구세주, 화해자, 대속주, 중보자, 다윗의 자손, 메시아, 그리스도, 생명의 주, 생명수, 임마누엘, 진리, 빛, 길, 목자, 왕, 선생, 밀알, 친구, 빛 등. 그런데 제가 제일 좋아하고 붙잡고 싶은 예수님의 정의는 ‘살림’입니다.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한복음 5:21) 말씀처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예수님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이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뜻인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셨으니, 우리도 이웃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살리는 그리스도인을 가르쳐 저는 ‘작은 예수’라 부르기 시작했고, 살림이 제 신학과 신앙과 삶 속에 주제어이자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생명, 살리는 작은 예수로 살고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예수! 성경에서 작은 예수의 모델이 있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저는 삭개오를 꼽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삭개오는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의 언어로 ‘대 개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첫 마디는 다른 이와 달랐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니 비로소 ‘사람’이 보이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살리는 작은 예수가 되면 이웃이 보여야 합니다.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를 만나면, 남편이 보이고 아내가 보여야 하고 긍휼이 여겨야 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을 만나고 믿은 후 삭개오처럼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고백은 작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그리고 싶으십니까? 사랑을 그리십시오. 사랑을 그리면 하나님이 그려집니다.”

살려내야 할 이웃을 보자
그렇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바르고 사랑이 넘치는 건강한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의 눈에는 살려야 할 이웃이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개혁 주일 아침에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고 작은 예수가 되게 하시고, 우리 눈에 드디어 우리가 살려내야 할 사람이 보이게 하옵소서.”

학술모임 “나의, 우리의 종교개혁 생각

종교개혁 500돌의 의미를 단지 전문 신학자나 교회사가의 입에만 의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었다. ‘나의, 우리의 종교개혁 생각’이란 이름으로 10월 31일 숭실대에서 열린 한 ‘작은’ 학술모임은 직종이나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가 ‘개혁’의 주제를 두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어 개혁가들의 믿음을 새삼 다지고자 했다.
이날 발제를 한 사회학자이자 목사인 박영신 교수(연세대 명예교수)는 “개혁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오직 말씀’에 기댈 뿐 다른 것에 기대지 않는다”면서 “그 말씀을 두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피며 말하는 바, 이 일은 으슥한 외진 공간에 들어가서야 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떠들썩한 집단의 고함소리를 함께 내지른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고립화와 다수 대형화 그 모두를 거부한 채 모두가 귀 기울여 ‘말씀’을 함께 새기면서 겸허히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만남의 공동체, 모두가 학생이 되고 모두가 선생이 되는 평등하고 대등한 대화 공동체에서, 이 일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박교수의 기조강연을 발췌했다.

오직 말씀의 권위에 기댐/박영신
종교개혁은 교권을 손아귀에 넣고 있던 이른바 ‘성직자’의 특권과 그 지배 체제를 허물어뜨린 운동이었으나, 특권층의 지배 행태에 대한 증오와 원한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면죄부라고 하여 돈을 거두어들이는 교회의 관행에 대한 불만이 오랫동안 온 유럽에 퍼져 있었고, 문제 제기도 곳곳에서 번져 나왔지만 루터는 그러한 원망을 등에 업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새기면서 그 ‘말씀’의 빛으로 ‘현실 교회’의 거짓된 정체를 보게 되었다. 그에게 면죄부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의 왜곡과 오류 문제였다. ‘말씀’이 그의 눈을 뜨게 해 그를 현실에 가만히 안주하지 않게 했다.
그가 외친 ‘오직 말씀’은 여러 ‘오직’ 가운데 다만 하나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그 모든 것을 가늠하는 판단의 근거였다. 종교개혁 운동의 원인과 전개 과정은 ‘말씀’의 이끎 이외에 다른 것으로 풀이될 수 없다. ‘말씀’에 대한 이른바 그 ‘신학’이 종교개혁 운동의 독립 변수였다. 루터는 ‘말씀’이 이끄는 데로 나아가 로마 교회와 맞섰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오랫동안 ‘성직자’의 독점물이었다. 성직자의 테두리를 벗어나 평민에게, 평신도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교회 당국’의 책일 뿐이었다. 개혁가들은 이 ‘말씀’이 교회의 특정 공간 안에, 성직자의 서재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씀’이 교권의 지배 밑에 있어야 된다는 로마 교회의 주장을 더 이상 용인할 수가 없었다. 성경을 교회 울타리 넘어 밖으로 끌어내어 널리 읽히도록 라틴어에서 토박이말글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의 뜻을 따라 성경을 모국어로 옮기고자 한 윌리엄 틴들이 캔터베리 대주교와 나눴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틴들은 평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토박이말글로 옮겨놓고자 했고, 이를 위해 교회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성경 번역의 뜻을 가진 그에게 대주교가 건넨 말은 “무슨 말인가? 일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였다.
교회 당국은 성직자의 지배 체제를 지키기 위해 성경을 조작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할 뿐 성경이 일반 평민에게는 미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평민을 무식의 옹벽 안에 가두어두고자 한 것이 교회의 정책이었다.

진리란 인간의 욕망을 폭로하고 체제의 허구를 척결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기득권 세력을 언제나 불편케 한다. 이 세력은 진리의 전파를 두려워한다. 기득권을 누리기 위하여 진리를 제한하고 억압하고 압살한다. 그러나 진리는 그렇게 죽지 않는다. 살아난다. 개혁가들에게 이 진리는 ‘말씀’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귀 있는 자들이었고,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입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이 진리는 모든 것 위에 있는 초월의 권위였다. 이 세상 누구도 이 ‘말씀’에 도전할 수 없었다. ‘말씀’ 앞에서는 절대 권력도 있을 수 없고 절대 교리도 있을 수 없었으며, 절대 교회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던 질서, 교리, 위계 관계 모두가 ‘말씀’의 권위에 의하여 점검의 대상이 되고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교권 세력의 기득권도 예외이지 않았다.

‘말씀’과 등가를 이루는 것은 애초 존재 불가능하였다. ‘오직 말씀’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의 근거이자 권위였다. ‘말씀’에 터하지 않고 맞지 않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개혁가들은 이 진리의 명에 따라 교회 세력에 맞섰고 이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였다.
루터가 로마 교회와는 달리 ‘만인 제사장론’을 펼 수 있었던 것도, 틴들이 주교의 생각과는 달리 이른바 ‘성직자’와 ‘평민’이 다르지 않다고 여길 수 있었던 것도 오직 이 ‘말씀’의 권위에 기대었기 때문이었다.

정리=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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