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온다’는 ‘자서전 쓰기학교’에서 만난 소중한 이야기들을 담는 코너입니다.

이제 갓 오십 줄에 접어든 A와 어느새 환갑이 된 B까지, 우리 다섯 남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저녁을 먹고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무박 2일 여행을 떠나는 식으로 수년 동안 만나왔다. 모임의 이름도 없고 어떤 규약이나 의무도 없다. 만나보면 그날의 주제가 생기기도 하고 한두 사람의 이야기만 듣다가 헤어지기도 한다.
그날은 C가 신문기사 하나를 읽어주었고, 자연스럽게 ‘공방예찬’이라는 주제가 생긴 셈이었다.

“나무를 다듬고 짜 맞추고 마감하는 작업은 글을 쓰는 일보다 훨씬 고된 노동이다. 네 시간 정도 그야말로 말도 없이 대패질을 하면 비로소 간신히 득도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 … 내가 몸을 움직이고 공을 들인 만큼 작품의 완성도는 좋아진다. 가장 원초적인 근육을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희열은 달콤하고 뿌듯하다.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지고 여유로워지고 인내심이 강해진 것은 덤이다.”
- <조선일보> 1월 22일자 “왕년에 연장 좀 다뤄본 상남자…그곳에 가면 겸허해지는 이유” 중에서


C는 ‘몸을 움직이고 공을 들인 만큼 작품의 완성도는 좋아진다’는 구절이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았다면서 “공방의 땀을 발견하는 재미가 인생의 또 다른 맛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B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D가 C의 말을 긍정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태리 출장을 갔다가 만났지 아마. 이 청년은 일종의 유리공예가야. 처음 만난 사람인데 어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지. 이 친구는 매일 아침마다 공방에 나와서 청소를 하고, 가게 문을 열고, 손님들을 기다리면서 아름다운 구슬을 만드는 게 일과야. 그런데 이 친구가 그런 말을 했어. 그 하루하루의 노동이 자신의 재능을 만들고, 또 자신의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거지. 난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때로는 때려치고 싶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그 자리에 묵묵히 있는 것, 그 끈기야말로 재능이 탄생하는 ‘비밀의 화원’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 말이지.”

재능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오랫동안 집중할 때 생겨난다는 의미였다. ‘재능’이라고 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아닌, 오래 우려낸 곰탕 같은 게 재능의 또 다른 의미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몇 해 전부터 뒤늦게 전업 작가로 뛰어든 A도 ‘글쓰기 공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글쓰기의 전제조건이 ‘영감(靈感)’이라고 말하죠. 나도 국어 시간에 그렇게 배운 것 같아요. 그런데 영감이 글쓰기의 전제조건이라고 알게 된 순간부터 글 쓰는 일이 어떤 특별한 사람만의 신성한 영역처럼 느껴졌어요. 저만 그런가요? 그런데 언젠가 작가 김훈 선생이 한 말이 위로가 되었죠.
‘영감이라는 게 무슨 개소리인 줄 모르겠다. 얼어 죽을 영감. 평생 단 한 번도 영감이라는 게 와 본 적이 없어. 나도 그놈의 영감이라는 게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선생은 작업실 벽에다 ‘필일오必一五’라고 써놓고, 하루에 200자 원고지 다섯 장씩 쓰는 걸 꼬박 지켰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영감이란 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땀이 응고되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별 재능 없어 보이는 저에겐 그 말이 어찌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날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문득 종아리 근육에 힘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의사의 권고로 올 봄에 시작한 운동 덕분이었다. 아침이나 저녁에 한 시간 가까이 조깅을 하면서 흘린 땀의 양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내 몸은 근육이라는 걸 만든 셈이었다. 내게 생긴 이 근육이란 게 어찌 보면 누군가의 재능이거나 영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렇게 나름의 공방에서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가운데 비로소 소중한 무엇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보다 공방에서 오랜 대패질 끝에 태어난 어떤 것이 더 가치 있을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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