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톨스토이를 읽게 된다. 특히 욕망으로 인해 부서져 가는 이 시대의 비극을 목격할 때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꺼내 읽는다.
‘땅’과 ‘땀’을 소중히 여기며 살던 파훔이란 소작농이 있었다. 그러나 남의 땅을 빌려 농사하던 파훔은 애써 얻은 수확도 소작료로 지불되니 가난을 면치 못한다. 노력 끝에 약간의 자기 땅을 갖게 되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파훔, 어느 날 한 상인으로부터 “바시키르 마을에 가면, 누구든지 1000루블만 지불하면 하루 동안에 밟은 모든 땅을 소유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파훔은 가산을 정리한 후 바시키르 마을로 가서 1000루블을 지불하고 계약을 맺는다. 계약조건은 오직 하나, 그것은 해지기 전에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파훔은 앞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린다. 앞으로 갈수록 내 땅이 늘어나는 기쁨에 도취된 파훔, 순간 자신이 너무 멀리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급하게 돌아가지만 도착 후 심장파열로 죽음을 맞는다. 결국 파훔에게 주어진 땅은 ‘길이 6피트, 너비 3피트’라는 ‘작은 무덤’뿐이었다.
파훔을 죽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분명 의학적 소견서에는 ‘사망원인 - 심장파열’로 기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훔을 사망에 이르게 한 직접병명은 ‘조금 만 더’라는 ‘탐욕’이었다. 파훔이 조금만 욕심을 줄였다면, 곧 ‘더’가 아닌 ‘덜’을 선택했다면 그곳에서 찬란한 시절을 보내었을 것이다.

삶은 ‘더’와 ‘덜’의 선택이다. 아니 ‘더’와 ‘덜’의 싸움이다. ‘더’가 ‘과욕’이라면 ‘덜’은 ‘절제’이다. 하버드 대학을 나와 그 누구보다 미래가 열려 있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28세 때 월든 숲속으로 떠나 그곳에서 2년 2개월을 자연과 함께 지낸다. 그리고 그때의 삶을 담은 글 <월든>에서 “없어도 되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부자다”라고 말한다. 삶에서 ‘더’를 덜어내는 것, 그래서 ‘덜’로 사는 것, 그것이 ‘참 행복’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황금으로만 건축한 행복’이 얼마나 부실한 것인가를 알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그것을 몰랐던 파훔, 그것은 각자에게 ‘기쁨’과 ‘죽음’이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안겨 주었다.
골짜기는 메울 수 있어도 마음속 욕심은 메울 수 없다. 문득 욕심을 채우려 ‘더’라고 외치며 무섭게 질주하는 파훔이 ‘내 속’에 있어 흠칫 놀란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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