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가 제일 큰일
날짜가 되자 내비게이션을 따라 주소지로 가족들이 속속 당도했다. 방이 많고 넓은 펜션에 가장 먼저 도착한 큰 언니와 막내는 여러 날 많은 사람이 지내야 하니 기본 음식이 있어야 한다며 만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속이 꽉 찬 이북식 만두를 이백 개나 빚어 늘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오빠네 냉동고에 채워 놓았다.
“뭘 해주리?” “부대찌개, 갈비찜, 황태구이, 잡채~”
오빠는 그리던 메뉴를 줄줄이 대고 있었다.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을 시작해 낮 시간에 박물관을 가고, 둘레 길을 걸으며 근사한 외식을 해도 한 끼 식사는 반드시 밥을 해야 하는 한국 사람들. 여러 사람이 모이면 함께 하는 식사, 그게 제일 큰일이었다.

같은 편 되어주기
조카 결혼식으로 모여 큰 행사를 치르고 났기에 주빈인 작은 오빠 부부는 고단이 밀려왔을 거였다. 그 즈음 “마음 안 맞아서 못 살겠네”라고 볼멘소리를 시작한 오빠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올케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마구 읊어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동생들은 진정시키려 “오빠, 오빠 물 한잔 마셔”하며 의자를 내주고 큰언니는 “너 많이 힘들었겠다”라며 편을 들어 주었다.
“지금만 해도 그래요. 운전을 하면 옆에서 왜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지 몰라요. 피곤해요 정말.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안 고쳐요. 잔소리가 나를 위해서라고요? 자동차 사고를 누가 더 많이 내나 물어보세요.”
오빠는 친형제들을 만나니 그동안 쌓인 얘기가 막 터져 나오는 거 같았다.
그때 큰 오빠가 나섰다.
“너 그런 일로 그렇게 화가 나니? 난 누구에게 약점을 알려준다고 해서 고쳐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겐 습관이 있고 고집이 있어서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그냥 봐주며 살지 않으면 너 힘들다. 난 내 까칠함을 알게 되면서 고쳐보려고 애쓰는데 그게 안 되더라. 그걸 느끼게 되면서 남들한테 조금 너그러워지자고 마음먹게 됐고.”

얘기~ 우리가 좀 그렇지
마치 가족치료 자리에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듯, 한 마디씩 하고 있었다.
“우리 식구가 좀 예민하지. 재미없는 말이나 반복되는 말 듣기 싫어하고.”
서로들 우리 원 가족의 습성을 분석하며 현재 각자의 가정에서 어떤 문제들을 갖고 사는지 얘기가 흘러 나왔다.
“화나면 풀기 어렵고, 상대방이 너무 쉽게 지나가며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우리는 그걸 얼마나 우습게 여기니?”
은퇴 후 너무 달라진 생활 속에 갈등을 접하는 오빠들, 이미 이런 과정을 진하게 겪고 있는 큰언니가 ‘너희는 다 몰라.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너희도 이제 시작이다’라며 남자 은퇴가 가져오는 변화를 얘기했다. 한참 현장에서 뛰느라 동동거리는 동생들은 눈앞의 커다란 과제라 또 다른 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언제 형제끼리 이만큼 자신들의 모습을 내놓았던 때가 있었던가.

“모두 잘 있어요!”
문득 얼마 전 보았던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라는 이탈리아 영화가 떠올랐다.
결혼해 분가한 자녀들이 부모에게 전화로 늘 하는 말이었다. “모두 다 잘 있어요.”
그런데 홀로 된 아버지가 이번에 자녀들 집을 한 바퀴 돌아 방문하겠다며 나서니, 집집마다 아버지 맞을 준비로 허둥대는 것이었다. 알려준 직장에서 더 이상 근무하고 있지 않은 자녀, 부부가 별거 중인 집 등, 제각각의 어려움을 안고 있는 자녀들이 멀리 떨어져계신 노년의 아버지에게 곧이곧대로 말하기 어려워서 문제를 감추고 살아온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겠다는 아버지를 맞이하며 현 상황을 위장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노년의 아버지는 이런 사실을 대강 눈치 채며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다. 모두 다 잘 지낸다더니….
그러나 아내의 무덤 앞에서 선 아버지 역시 “여보, 모두들 잘 있어”라고 말한다.

몇 해 전 부모님이 다 떠나시고 이제 오남매가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부모님이 안 계신 자리에서 오남매는 좀 더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도 부모님께는 그렇게 말했던 거 같았다.

객원기자 전영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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