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면 관계로 수상작 내용을 모두 실을 수 없어 요약 또는 일부만 싣습니다. <편집자 주>

* 일반부문 으뜸상 
“어머님, 사랑해요!” / 김정원 (사랑의교회)

딸들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아예 애원이다. “엄마, 제발 할머니에 대한 서운함 모두 풀고 할머니를 온전히 사랑할 마음 주시라고 한나처럼 기도하며 통곡해 보셔요. 엄마가 오히려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게 될 거예요.”
짜증나게 간절했다. 여식들만은 한 많은 삶을 살아온 이 에미를 이해하고 내 편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줄 알았건만 저들의 마음이 할머니 곁으로 옮겨간 것 같아 서글펐다. 멍울진 속상함과 실망이 서럽도록 터져 나왔다.
결혼 초에는 있는 집 딸이라 기를 꺾어놔야 한다고 하셨고, 남편이 출세 가도를 달려 승승장구할 때는 당신 아들 덕분에 며느리인 내가 호강한다며 못마땅해 하셨고, 남편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는 남처럼 돌아서 버리셨다. 돌부리처럼 채이고 채여 심장의 과부하로 무시로 응급실 신세를 지며 생명줄이 끊어질듯 긴박한 삶을 이어왔다.
“이보다 어찌 더 할머니를 사랑해야 하는 거니?”
가끔 시어머님을 찾아뵙는 걸로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 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딸들의 간절한 권유를 뿌리칠 만한 용기는 내게 없었다. 내게 쌓이고 쌓인 어머님을 향한 울분들을 떨쳐버리는 작업을 기도로 서둘기로 했다. 젊어서부터 불편했던 무릎 관절로 시어머님은 80후반이 되면서 거동이 어려워 요양원으로 옮겨 가 계셨다. (중략)
뵈러 갈 때마다 몸이 점점 악화되어 휠체어와 타인의 보조에 의존도가 높아져 갔다. 그 모습을 뵐 때마다 끓어오르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을 가누지 못하다가도 무시로, ‘인과응보이신 게야, 회개하셔야지!’하며, 내 속에서 얄궂은 심술과 고약한 심보의 가시가 돋아나오곤 했다. 
나이 70이 넘도록 쌓인 원망의 철옹성을 무너뜨릴 방도가 막연해서다.
마지못해 시작한 기도는 소낙비 같은 눈물을 쏟아내는 기적을 몰고 왔다. 새벽마다 갈급한 심령으로 기도에 매달렸다.
‘어머님의 모든 잘못을 사하여 정케 하시고, 평안히 주님 품에 안기게 하시며, 한 번만이라도 이 며느리와 진실한 사랑을 나누게 해 주십시오. 나 또한 시어머님에 대한 서운한 일들일랑 기억조차 나지 말게 하시고 사랑할 마음만 부어주십시오.’
나의 기도가 점점 절실해졌다. 며칠 후 다시 어머님을 뵈러 갔다.
(중략) 연인의 입국을 기다리듯 대기실에 초조히 선 내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몸을 휠체어에 동여맨 어머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벙어리가 되었고 몸은 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초췌해지신 어머님,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어머님을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부서질 듯한 한 줌의 몸을 안고 나는 어머님 품에 코를 박았다. 눈길 한 번 주는 것도 인색하셨던 어머님의 시선이 내게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히 따뜻하고 아늑한 눈빛이셨다. 오래오래 농축된 사랑의 결정체가 발산되는 아름다운 눈길이었다.
터질 듯한 마음으로 ‘어머님, 사랑해요!’를 어머님 귀에, 그리고 가슴에 심듯이 쏟아 부었다. 이렇게 맺혔던 사랑의 매듭이 풀어지는 아픔은 컸고 동시에 황홀했다.
‘끄윽~ 끄윽~’
내 눈에서도 회한의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씩씩한 여장부로만 알았던 어머님의 초췌한 모습이 내겐 차라리 아픔이었다. 내 살아생전에 어머님과의 진정한 화해는 없을 줄 알았지만, 어머님 얼굴에 내 얼굴을 부벼대자 서로에게서 분출된 사랑의 열기가 충돌하면서 서로의 허물이 녹아 맑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묵혔던 아집과 원망의 덩어리들을 녹여내고, 주님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으며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이곳까지 이끌어 오기에 노심초사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딸들에게도 감사한다. 기도를 응답해주신 주님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되어 사랑의 마음으로 영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기쁨을 얻었음에 거듭 감사한다. 

* 버금상 
주님을 향한 100가지 감사 / 김신자 (명성교회)

1. 만성골수염 백혈병 환자가 13년째 가을잔치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2. 겁 많고 무서움 많은 제가 골수도 잘 빼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8. 아침이면 새들이 노래하고, 청솔모 딱따구리가 찾아주는 동네에 살게 하셔서 감사해요.
9. 가난하고 병든 몸이지만 월세 밀리지 않고 따뜻한 아랫목 주셔서 감사해요.
10. 인간의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다 내려놓는 ‘비움’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요.
14. 고가의 항암제 복용할 수 없어 주님 앞에 울고만 있을 때 임상실험으로 길을 열어주심 감사해요.
15. 숨을 못 쉬고 응급실에 실려 갈 때 주님께서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셔서 온기를 주심, 감사해요.
18. 날 버리신 줄 알고 너무 놀라 울부짖을 때 나와 함께 울고 계신 주님 뵈옵고 위로 받음, 감사해요.
20. 어느 것 하나도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하늘의 평안을 내려주심 감사해요.
23. 사랑의 주님이신 줄만 알았는데 능력의 주님, 채찍의 주님,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신 치유의 주님 뵐 수 있게 하심 감사해요.
24. 성경을 펼칠 때 말씀이 살아 움직여 크게 튀어나와 제 가슴에 박힘, 주님 감사해요.
34. 만성폐쇄성폐질환 속에서도 목소리 살려주셔서 맘껏 찬송하게 하심 감사해요.
38. 기도의 한 가지라도 소홀히 듣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분주히 들락날락 저를 도우심 감사해요.
45. 벌거숭이로 어디로 가야 하나 울먹일 때, 짙은 안개 속에서 다가오신 주님께서 겉옷 벗어주시고 IMF 잘 이겨낼 수 있게 손잡아 이끌어내심 감사해요.
49. 가난하고 병든 몸이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을 같은 모습으로 다가가 손잡아줄 수 있는 믿음 주셔서 감사해요.
51. 주님 외에는 사랑하지 않고 탐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마음 주심, 감사해요.
55. 세 딸들이 엄마 옆에서 엎치락뒤치락 같이 잠을 자고, 살고 싶은 이유를 날마다 주셔서 감사해요.
56.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피눈물로, 꺼이꺼이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주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아이들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심, 감사해요.
85. 주님의 방법과 섭리를 깨닫게 하셔서 감사해요.
94. 세상 끝날 까지 아름답게 동행해 주실 것을 소망하는 믿음 주셔서 감사해요.

* 일반부문 버금상 
“그래도 감사합니다”/노수빈 (논산제일교회)

뒤돌아보면 결혼 이후 저의 살아온 날들이 버림받은 고아처럼 혼자 인 듯 내 힘으로 산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에 함께 하셔서 인도하신 은혜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중략) 술에 찌들어 날마다 고함과 괴성을 지르시는 아버님을 보며 제생활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웠던지 친정어머니께서 오시면 장독대에 가셔서 소리 없이 우셨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근본뿌리는 변하지 않아야 하며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생명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니냐. 용기를 잃지 말고 살 거라. 반드시 좋은날이 올 것이다.”
그 두어 마디로 위안을 주셨던 어머니의 위로가 지금도 가슴을 짓누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축복하셔 아이들은 정직했고, 두 딸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당시 남편은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신통치 않은데다가 보증으로 인해 우리는 그나마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주님! 한 번만 더 은혜를 주셔서 억울한 제 인생을 역전시켜주옵소서. 세상의 영적전쟁에서 싸우며 믿음의 시선으로 소망 중에 걸어가는 이유는 그 길 끝에 계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중략) 32년 동안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최선을 다하여 남편을 살리려고 노력했으나 2014년 10월 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먼저 천국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감사합니다. 욕망으로 가득차지 않게 살도록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세상 살아보겠다고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이었던 사람, 제 삶의 언저리에 수북이 찍힌 발자국들이 어지러워 온몸이 저리지만, 그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 겪은 고난의 가치 있는 경험들을 더욱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붙드는 감사의 신앙생활로 인도하시기 위한 주님 은혜임에 감사드립니다.

* 버금상 
살아있음의 기적/문수정 (명성교회)

2014년 11월 나는 뜻하지 않게 뇌종양판정을 받았습니다. 3.6센티미터의 종양이 나의 머리 숨골에서 자라면서, 신경을 눌러 마비증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교만하고 부족했던 모습뿐이었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주님을 한 번이라도 기쁘게 해드리며 살아왔나?’ 하는 생각과 함께 회개가 나왔습니다. 지난 13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의인인체 하며 살아온 나의 모습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주님은 이러한 나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적나라한 나의 죄들을 낱낱이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종양으로 인해 팔다리에서 힘이 점점 빠졌고, 급기야는 내 이름 석 자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뇌압으로 인해 위산이 역류해서 코로 뿜어져 나오는 고통과 먹었던 물도 다 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가고 싶었지만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어 교회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예배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소망을 갖고 기도했고, 주님께서 반드시 나의 병을 고쳐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중략) 수술 없이 뇌종양이 낫기를 기도했지만, 결국 뇌종양을 제거해야 한다는 수술 날짜 3월 25일을 앞두고, 나는 두려웠습니다. 또한 주치의 선생님이 말하는 수술 후에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듣고 한없이 나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살리시고 구원하실 이는 예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술을 잘 마치게 하셨고, 수술 후에 받기로 했던 방사선 치료도 안 받아도 될 정도로 종양의 제거가 깨끗이 되었습니다. 종양에 밀려 찌그러져 있던 좌뇌와 우뇌 모두 정상적인 자리로 되돌아가 놀라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기적이라고 감히 고백 드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라는 욥의 고백처럼 믿음의 훈련과 연단이 축복의 통로임을 고백합니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에서도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넘치는 감사로 주께 영광 돌립니다!

* 푸른나무상 
내게 주신 100가지 감사 / 정다영 (중3·인천제2교회)

1. 먼저, 주님이 나에게 주신 감사거리를 생각하고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심에 감사!
6. 하나님 믿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날 수 있게 하심을 감사. 내가 아플 때나 두려울 때나 긴장할 때나 언제든지 내 두손 잡고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 있음에 감사!
11. 교회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신앙을 함께 키워갈 수 있게 하심을 감사.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하면 달려올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게 하심을 감사.
13. 가끔 후닥거리고 다투기도 하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무지 큰 하나 뿐인 동생을 주심에 감사.
16. 너무 힘들 때, 아무에게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조차 말할 수 없었을 때, 홀로 외로이 남겨진 것처럼 느껴졌을 때, 내 작은 신음소리마저 듣고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
44. 예전에는 친구를 비난하기도 했고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친구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심을 감사. 하나님을 빨리 만나게 하심을 감사!
76. 교회는 매주 가지만, 어쩌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었는데, 일찍 내 마음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
100. 100가지의 감사제목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게 하심을 감사. 주님이 내게 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100개이지만 앞으로 내 입에서 주님을 향한 감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교정부문 으뜸상 
“성경이 저를 살렸습니다!” / 김창길 (전주 교정마을)

저는 1990년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현재 전주교도소에서 2002년부터 지금까지 ‘조현병’으로 정신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라 글도 모르고 계산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 들어온 지 약 14년이 지날 무렵 동료 수용자의 권유로 성경읽기와 쓰기 훈련을 받으며 4년 동안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쓰고 12번을 읽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곁에서 본 친구로부터 ‘이제는 됐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됐느냐?’고 물어보니, “하나님께서 창길이에게 말씀을 통해서 글, 즉 말을 가르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며 뜻이 무엇인지는 잘은 모르고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감성’이 살아난 것입니다. ‘느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다른 이들처럼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올리며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의지와 관계없이 ‘허허허, 하하하’ 웃음이 나며, 하나님을 향해 고개 들고 아름다운동행을 통해 이분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렸습니다.

‘응원해 주는 사람, 기도해 주는 사람이 많으면 어떤 괴로움도 견딜 수 있습니다. 전화 한 통화에 힘을 얻고 문자 한 줄에 다시 일어섭니다. 왕따가 힘든 것은 소외를 당하는 것, 즉 외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내 곁에 있는 동료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친절한 미소’, ‘꾸밈없는, 조건 없는 미소’로 재기의 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제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그 순간까지 ‘아름다운동행’이고 싶습니다. 아름다운동행의 밝은 미소를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통해 ‘희망’을 얻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는 것. 그 죽음 앞에서 어떤 존재와 ‘동행’이 되는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께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버금상 
남한에서 만난 또 다른 가족/양영일 (부산 교정마을)

북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들. 남동생 두 명, 여동생 한 명, 거기다 사랑스런 아내와 지금 7살 난 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마냥 아린 기억, 두 손 모아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시라고. 만나는 그 날까지 무탈하시라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 나는 원산이 아닌 ‘부산교도소’에서 복역하는 수인으로 돌아옵니다. 탈북자 출신의 재소자가 현재 내 신분입니다.
탈북자 몇 명이 인솔자와 함께 중국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주야로 3일을 달려 중국 국경지역에 도착하여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라오스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질곡을 넘어 태국의 치앙마이를 거쳐 메사이로 들어가 그곳의 경찰서에서 밀입국 죄명으로 보름간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방콕으로 이송하여 한국 대사관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 후 원산과 환경이 비슷한 부산에 정착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저를 이방인 대하듯 하여 얹혀사는 이질감으로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이런저런 고생도 수없이 많이 했습니다. 배도 타고, 일용직도 하고 제철소 현장일, 오리공장일 등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배운 지식과 사고로는 남한에 정착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중략)뜻하지 않은 작은 말다툼이 화근이 되어 북에서 품고 왔던 풍운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수인이 되고 보니,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한 게 너무나 부질없고 허망하여 내 자신이 한심하고 남한이 원망스럽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후회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교도소에서도 쉬운 삶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저의 사정을 알고 장로님, 목사님, 집사님, 전도사님 등 지인들이 진심으로 내게 다가와 온정의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그 손길을 통해서 사랑을 받고 감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시며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이 남한에서 만난 또 다른 내 가족들입니다. 

* 버금상 
진심, 병든 마음을 치유하다 / 이윤석 (포항 교정마을)

작년 이맘때 나는 대구교도소에 있었다. 복수의 화신이 되리라. 진실의 침묵 속에서, 가슴 깊은 내면에서 울려퍼진 소리, 절망을 뿌린 자리마다 지독한 분노의 울분을 터뜨리고 말리라. 정말이지 일말의 희망도 없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 악마에게 완전히 굴복을 당하기 직전 교도소에 외부인 상담이 이루어졌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은 채 상담실로 향했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라 적잖이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이 뒤이어 벌어졌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내 두 손을 붙잡고 힘들지 않느냐, 고생이 많다며 안부를 물으시고 환대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구속 수감이 되고 1년 여의 시간이 흐를 동안 그런 환대를 받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불우했던 가정사, 재판을 받게 된 이유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어둠에 묻혀진 내 절망의 이야기들이 그분 앞에서 모두 드러나고 마침내 빛을 볼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진심어린 온기는 어느새 꽁꽁 차갑게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이고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았던 마음의 병마마저 몰아내고 있었다.
그날 밤 지금껏 모아 두었던 약들과 어리석은 잡념들을 모두 변기 속에 내려버렸다. 그분의 권유대로 종교집회도 나가고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것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새, 마음 속 악마는 물러가고 그 자리에 주님이 자리잡게 되었다. 증오와 미련들을 버리니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피해자들이 먼저 마음을 돌리고 내 편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권력도, 돈도 하나 가진 것 없는 나에게 그 보다 더 큰 기적은 없었다.
“미움이 아무리 불을 꺼도 사람은 더 많은 불을 지핀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리석게도 미움과 분노에 굴복해 눈이 멀고 어둠에 사로잡혀 빛을 보지 못했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그 암흑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지만, 온정과 사랑을 가진 한 사람의 진심어린 마음으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아픔을 나눔으로 그로 인해 어리석은 잡념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금도 어디선가 타인의 아픔을 진심으로 나누고 있을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늘 함께 하길 나는 기도한다.

* 버금상 
언제나 감사하며 / 김완욱 (춘천 교정마을)

저는 귀하고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소중한 것들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공짜라고 생각하며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공기, 물, 흙, 나무, 소금 그리고 빛.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이어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너무도 존귀한 것들입니다. 삶 자체가 감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불혹을 넘은 이제야 감사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마저도 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감사를 알게 된 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놀라운 발견이자 축복이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몸과 지속되는 생활고 속에 있는 처지를 비관했습니다. “왜 나만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 하지?”하며 세상을 원망하며 피해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황금같은 시기인 20대에 뺑소니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고, 30대의 나이에는 대출까지 받아 시작한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한동안 우울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면 좌절하고 극복하기를 반복하면서 늘게된 것은 술이었습니다. 무얼 해도 안되기에 몇 번이고 극단적인 선택의 시도도 여러번 하였습니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교정시설의 수형자로 살고 있습니다. 차디찬 철장안 좁은 방안에 갇히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말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빛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어둠 속에서 원망과 후회로 탄식하고 있을 때 한줄기 빛을 주신게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으며 저는 점차 변화되어 갔습니다. 가장 큰 변화가 감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는 감사할 게 너무도 많습니다.
동료수형자와 마음을 나누고 서로 의지할 수 있어서도 감사하며 무엇보다 세상을 볼 수 있어 가장 감사합니다. 현재 저는 보이는 눈 마저 실명할 수 있는 질환을 앓고 있기에 본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더 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미약한 시력이나마 볼 수 있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년 7월이면 사회에 복귀합니다. 지금의 감사하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분명 건전한 사회복귀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죄인인 보잘 것 없는 저에게 새 삶을 살게 해주신 주님께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소리높여 찬양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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