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씨는 오늘도 결혼한 아들에게 전화를 받는다. “그래, 다 잘 있니?” 묻자 새 아이와 함께 “네, 잘 있어요” 스피커폰으로 대답한다.
지난 주에도 그 전 주에도 ‘잘 계시느냐’는 안부 전화에 ‘별일 없다’고 했었다. 통화가 결혼 전 같지 않게 살갑지 않은 게 왜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몇 가지 얘기를 했더니 “알아서 할게요”라며 달가워하지 않던 모습이 마음에 남은 것이었다. 더 이상 자기 생활에 관여하는 것은 사양하겠다는 태도에 ‘결혼예비공부를 여러 시간 하더니 부모를 떠나라고 잘 배웠나보다’라며 쓸쓸히 웃었었다.

알아서 잘 살겠단다. 무엇을 더 바라겠나.
내 관심의 영역이 일부 사라진 느낌… 허전함.
아들은 외롭던 생활에 동반자를 만나 그냥 좋은 것인가.
독립적으로 생활해나가는 걸 감사해야 하는데,
아들과의 분리가 서운한 모양이다.


마음을 정돈하는 것
또 문자가 왔다. 곧 전화하겠다고.
‘따스하게 말하고 그전처럼 하자’고 마음먹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젠 짝을 지어놓으니 끼니를 어떻게 하나 물어볼 필요 없고, 옷 세탁이나 스타일링도 훈수 둘 게 없다.
더욱이 앞으로 공부할 일도 알아서 한다니 무엇을 말하겠나. 그러고 보니 그 전의 대화 내용은 모든 생활을 점검하며 짚어주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민영 씨는 이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들을 가장으로 독립시켜 내어놓으며 마음을 정돈하는 것이다. 더 이상 모든 것을 간섭하며 혼내는 엄마 역할은 끝난 것이다. 그것이 허전함이나 서운함으로 다가와도 이젠 그것을 딛고 인격적인 대화를 해나가야 한다. 익숙지 않아 말수가 줄어드는 게 자연스런 일일 수 있다.
어느 연극 연출가의 제언대로 ‘다 말하지 않기’로 한다. 마음 속 말들을 좀 간직한 채 바라보며 기다려주고 스스로 결정해 나가도록 하기.
어른 된 아이들이 내게 오는 만큼 받아주기. 거리 두고 서있는 큰 나무처럼 뒤에 있기.

날갯짓을 하겠다고 퍼덕거린다.
뒤뚱거리며 사춘기를 살아온 애.
부모는 이제라도 도와주고 싶어
모래주머니처럼 뒤에 서 있는데
그냥 기도만 해달란다.
그래, 뭐라고 기도할까.
“그건 주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알아서 하세요.”


방학이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으로 엄마를 번쩍 들어 올려 빙빙 돌리던 큰 아이, 등을 긁어달라고 바위같이 커다란 등어리를 내밀던 아들, 좀 길게 얘기해도 잘 듣고 있던 순둥이, 문득 문득 새로 받은 은혜의 얘기를 통해서 놀라게 해주던 신앙 친구.
품 안의 자식은 벌써 떠났지만 진하고 짠한 엄마와 아들의 애정마저 얼마만큼은 넘겨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래, 주님께 연결했으니 됐다.

전영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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