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조사단 체르노빌 직접 방문, 자신들의 미래 엿보기

3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아직도 ‘죽음의 악몽’이 진행 중인 체르노빌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듣기만’ 한다. 그래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찾아보았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방사능 누출 문제는 당시 직접 피폭을 당한 자들의 죽음으로 멈추지 않았다. 누출된 방사능은 원전 근처에 살던 주민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그들을 암과 심장마비 등의 병으로 서서히 죽음에 빠져들게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방사능은 원전사고 이후 태어난 아이들의 몸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1. 미하일 씨 부부
원전폭발 사고가 난 후, 피폭 지역에 살던 주민 1,000여명은 ‘코바린’이라는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정부는 이주민에게 200평의 땅과 집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미하일 씨 부부는 이사 오기 전까지 농사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미하일 씨는 수학교사였고, 아내는 협동농장의 회계 담당자였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주를 하고, 농사를 하며 모든 먹거리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원주민들이 오염지역 출신들은 위험하다며 가까이 하길 꺼렸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던 것. 게다가 이주한지 1년 후부터는 많은 이웃들이 죽어나가고, 죽음의 공포가 부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부도 원전 사고 때 피폭을 당해, 부인은 갑상선 수술과 섬유근종 수술을 받았고, 남편은 지금도 심근경색으로 고생하고 있다.

#2. 폴레스카야 학교 학생들
폴레스카야 학교가 있는 모자린 마을은 사고 지역으로부터 125km 떨어진 지역으로, 사고 당시 피난을 가지 않아도 되었던 오염단계 3급 지역이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모자린 마을에는 여기저기 아프다는 아이들이 많다. 3급 오염지역과 비오염지역의 3개 학교, 101명의 학생을 조사한 결과, 다리나 머리가 아프다는 학생이 절반을 넘었다. 원전 사고가 난 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태어난 아이들, 그것도 3급 오염지역과 비오염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까지 왜 아픈 것일까?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체르노빌의 악몽은 진행 중이다.

#3. 발렌티나 구샤 씨
원자력 발전소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이제는 완전히 폐허가 된 프리피야트에 살던 발렌티나 구샤 씨. 원전 사고 다음 날, 구샤 씨를 비롯해 프리피야트 시민 49,360명은 조만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정부의 약속만 믿고 간단한 짐만 챙겨 강제 이주를 당했다.
“저는 거기서 10년 동안이나 살았고, 가장 친한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단 하루 만에 그 친구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죠. 너무나도 슬펐어요.”
눈에 잡히는 물리적 삶의 공간이 한 순간에 파괴된 것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의 공동체 또한 사라진 것이다. 이는 원전 사고란 재난이 총체적 삶을 무너뜨린다는 의미.

#4. 후쿠시마의 미래
지난 5월에 개봉한 이홍기 감독의 다큐 ‘후쿠시마의 미래’는 체르노빌을 직접 방문한 후쿠시마 조사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사단은 체르노빌의 현재를 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가늠했다. 영화 속에서 사고가 난 지 3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후쿠시마 사람들은 아직까지 직접적인 방사능 후유증을 맞닥뜨리고 있지는 않다. 현재는 고통 받는 이주민들이 있고,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몰라 방사능 공포에 휩싸여 있는 단계다.
조사단은 이번 방문을 통해 자신들과 후손들의 미래를 본다. 그들은 원전 사고의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경각심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원전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남의 이야기로만 여길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박혜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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