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오지 망얀족 마을의 쌀농사꾼 박운서 장로

우리는 흔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는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박운서(모리아자립선교재단 이사장) 장로의 경우는 어떨까? 그의 삶은 불행한 것일까?

인생 1부와 2부
박 장로의 삶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삶’이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다음에는 뉴욕총영사관 경제협력국 영사, 대통령 경제비서관, 공업진흥청장을 거쳐 제1대 통상산업부 차관을 지냈다. 정통 경제통 관료로서의 길을 걸은 다음에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주)LG상사 대표이사 부회장, 데이콤 및 파워콤 대표이사 회장을 겸임했다.
숨 가쁠 정도로 화려한 이 이력서에는 차관 시절 대외 협상에서 보여준 열정으로 붙은 ‘타이거 박’이라는 별명과, 대기업 CEO 시절 보여준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붙은 ‘죽어가는 기업도 살리는 기업가’라는 별명이 후광처럼 따라 붙는다. 눈부시게 잘 나갔던 이 사람의 현재 모습은 과연 어떠해야 할까? 서울 인근 한적하고 잘 다듬어진 골프장에서 멋진 샷을 날리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본인도 그런 삶을 꿈꿨다. 열심히 일했으니 노년에는 그 정도의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지금 필리핀에 있다. 필리핀의 수많은 섬 가운데서도 가장 오지로 통하는 민도로 섬, 그 중에서도 문명과는 담을 쌓은 채 깊은 산속에 숨어사는 망얀족 마을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가 하는 일? 쌀농사다. 뭘까, 이 반전은? 도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이제부터 그의 삶에 일어난 ‘제2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망얀족에게 가라”
“은퇴를 하고 기도원에 들어갔다.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금식을 하며 철야집회에 참석했는데, 새벽녘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비몽사몽간이었지만 그것은 명확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내가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네가 가라. 망얀족에게.’”
2005년 3월경이었다. 박 장로는 2003년 말 우연히 망얀족을 알게 되었다. 필리핀으로 간 부부 동반 골프 투어 때 아내(김에스더ㆍ목사ㆍ예수선교교회)가 교회에서 후원해온 교회라며 한 번 들러보자는 말에 민도로 섬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망얀족과 조우했다. 하지만 이후 1년여 동안 그야말로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이상하게 꿈속에서 그 낡아 빠진 대나무 교회가 보이고 때가 뒤범벅이 된 채 콧물을 흘리던 아이들이 얼굴이, 유독 눈동자만 반짝거리던 아이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하지만 난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 나이에 제가 어떻게 그곳에 갑니까? 그곳은 늙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못 됩니다’하고 거부했다. 게다가 나는 선교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다. 타갈로그어도 할 줄 몰랐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단호했다. ‘갈렙은 85세에 헤브론 산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65킬로그램의 몸무게가 45킬로그램으로
그렇게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온갖 핑계를 대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던 박 장로는 떠밀리듯 결국 필리핀으로 향했다. 열사병 진단을 받은 아내는 결국 귀국했고, 혼자 남은 박 장로는 35도를 오르내리는 아열대의 땅에서 타갈로그어를 배웠다. 수돗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전기는 하루에 두세 번은 꼭 끊어졌다. 밤에는 온갖 벌레들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침이면 집안에 들어와 죽은 벌레들이 쓰레기통으로 한가득 차고 넘쳤다.
다 늙어서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하는 원망이 절로 들었다. 다시 서울로 도망치려고 짐을 싸서 비행기 표까지 예약을 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모든 상황과 일이 그로 하여금 떠날 수 없도록 얽어매었고, 결국 그는 그곳에서 농장을 시작했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전직 경제 관료이자 CEO가 머나먼 이국의 한 오지 섬에서 쌀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농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그가 한 고생은 다 설명하기 어렵다. 농장까지 길을 뚫고 물소를 이용해 경지정리를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흙과 벼농사에 관한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계속되는 시행착오로 주저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사이 사건 사고도 많았다. 밤이면 농장까지 개설해놓은 전기선을 현지인들이 모두 잘라가 버렸다. 물을 대는 펌프도 훔쳐갔다. 새로 사다놓으면 며칠 만에 또 훔쳐갔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내 몸무게가 63~65킬로그램 정도였다. 농장에서 내 몸무게는 45킬로그램까지 내려갔다. 걱정이 되었다. 서울로 들어와 정밀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검사 결과가 놀라웠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줄고 지방간도 없어졌다.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져서 40대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할 말을 잃었다. 서울로 올 때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사실 있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붙들려 필리핀으로 되돌아갔다.”

놀라운 변화
박 장로에게는 신앙적으로 중요한 몇 번의 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79년 미국 뉴욕의 롱아일랜드 공원에서였다. 친구의 빚보증을 섰다가 돈을 다 날리고 교통사고까지 나는 등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박 장로는 기도 중에 아버지가 보여주는 큰 할아버지와 다른 조상들의 관을 보게 된다.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이 죽음 이후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된 박 장로는 꿈에서 깬 후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을 토해낸다. 그동안 하나님을 떠났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그는 공원 구석에 차를 세워놓고 탕자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쏟는다. 그가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었다.
두 번째는 2008년 3월 필리핀에서였다.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온 세 명의 괴한은 박 장로의 손과 발을 묶고는 목욕탕으로 밀어 넣었다. 스스로를 NPA(필리핀 공산주의 반군 게릴라)라고 밝힌 강도들은 돈을 요구했다. 다음날 아침 은행에서 돈을 찾아주고 대신 절대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박 장로의 말에 이들은 권총 자루로 등을 내려친 다음 목욕탕 문을 닫아버렸다. 가까스로 박 장로가 결박을 풀고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는 강도들이 돈 될만한 것은 모두 털어간 다음이었다.
“그 사건 이후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믿음을 갖고 있다고는 했지만 그 이전의 믿음은 나 중심의 믿음이었다. 끝없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믿음이었다.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내 요구를 들어주는 하인과 같은 존재였다. 성과지향적인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인이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성취해가는 도구일 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 하에서 그분이 성취해가는 일이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역설적인 고백
박 장로는 민도로 섬에 모리아자립선교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망얀족의 교육과 자립을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전개하고 있다. 직업학교를 설립해 농사와 이발, 제빵, 운전 등의 기술을 가르치고 일정한 과정을 이수하면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끔 빵집도 열어주고 있다. 영농기술을 전수하고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작업은 과거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을 생각하면 된다. 망얀족이 스스로 설 수 있게 체계적으로 일종의 자립기반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은 아니다. 모리아자립선교재단은 망얀족에게 빵과 함께 복음을 전달한다. 지금까지 박 장로가 개척한 교회는 14개이다. 박 장로의 말에 의하면 그 교회들조차 박 장로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세울 수 없었다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에만 세울 수 있었다. 망얀족은 고산지대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교회를 세우면 좋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없는 외지고 험한 곳을 골랐다. 그러나 그곳에는 반드시 복음을 갈구하는 선택된 망얀족이 1~2명씩 꼭 있었다.
지난 5월 중순 잠깐 한국에 들어온 박 장로를 서울 양재동의 예수선교교회에서 만났다. 75세의 박 장로는 마른 체구에 흰머리가 가득한 시골 농부의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더 이상 타이거 박도, 죽은 기업도 살리는 열정의 CEO는 없었다. 하지만 그 또래 노인에게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형형한 눈빛이 주름진 얼굴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끌려간 민도로 섬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비로소 참된 행복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죽었다는 바울의 고백을 그곳에서 깨달았다. 개인적으로는 머리의 신앙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핀에서 사기도 많이 당했고 고생도 무지하게 했다. 편안한 노후를 위해 마련한 재산도 모두 그곳에 쏟아 부었다. 손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보았다. 바보가 되었다. 현지인들에게 하도 많이 당해 그야말로 봉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망얀족을 위해 나를 그곳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었다. 바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다. 참고, 참고, 또 참는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인간적인 생각이나 윤리, 도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죽는 훈련이었다. 오른뺨을 달라하면 왼뺨도 주어야 했다. 끝없이 용서하고 낮아져야 했다.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비로소 주님을 만났다. 자유함을 얻었다.”
자신이 원했던 삶 대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는 그 삶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행복’을 찾았다. 이 역설을 어찌할 것인가?

모리아자립선교재단은…
박운서 장로가 설립한 모리아자립선교재단은 필리핀의 소수민족 망얀족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지면의 제한상 자세하게 소개하기가 어려웠다. 궁금한 점이 있는 독자들은 재단 홈페이지(www.moself.or.kr)를 참고하기 바란다. 재단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의 문의를 기다리고 있다. 아울러 박 장로의 상세한 이야기는 최근에 출간된 책 ‘네가 가라, 내 양을 먹이라’(코리아닷컴)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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