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을 듯한 길가의 작은 소화전이 말합니다.
“오늘도 난 여전히 사용되지 못했지. 내게 사명이란 꼭 필요할 때 잘 쓰임 받는 거야! 그 때를 위한 기다림. 굳이 오늘 내가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이야!”
요즘 저의 모습은 길가에 멀뚱히 서 있는 소화전과도 같습니다. 이런 때를 지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기다림의 미학을 내세운 게으름인지, 뭔지 모를 모호함 속에서 마음과 생각이 길을 찾습니다.
길지도, 많지도 않은 경험이 영혼의 길을 가리는 경향을 봅니다. 무식이 용감일 적엔 가릴 것 없이 다 덤벼들었는데 어느새 이런 경우는 이래서, 저런 경우는 저래서라며 분별과 판단이 앞서는 걸 봅니다. 이래저래 생겨난 자잘한 서운함이랄까, 상처랄까, 어느새 축 늘어진 새의 날개 같은 저의 의지가 부끄럽습니다.

신앙이란 가면 속의 타성들
자동차 기화기에 타르가 끼면 한 번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처럼 요즘 제 모습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이 또한 학습이다 생각하고 하나하나 돌아보며 배워가는 길, 가볍게 털어선 안 될 거라 생각됩니다. 인생에 있어 두 스승이 있다지요. 저래야 된다는 걸 보여주는 스승과, 저러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스승. 해몽을 잘하면 흉몽도 길몽이 되는 것처럼, 주소를 바꿀 일이 아니라 나를 바꿀 일이라는 것을 말로는 잘 알지만 삶으로는 여전히 ‘깔학년’인 저를 절감하게 됩니다.
요즘 제 노래 길에 힘이 빠지는 일들이 겹치는 걸 봅니다. 자랑스럽게 여기던 일, 만나던 사람들, 그 이야기들을 글로도 쓰고 많은 이들에게 권유하듯 나누곤 했었는데, 세월 지나 드러난 실망스런 사실에 제 글도 부도가 나버리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이라는 가면 속에 숨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도덕적 해이) 때문입니다.
어느덧 젖어버린 타성으로 사역자들을 쉽게 부르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오해성이 있는 풍문을 흘려버리는 안타까움도, 주는 나의 피난처 나의 산성이라며 그 십자가 아래 숨어들어 변화를 이루기보다는 변질로 부패되는 모습들이 마침내 세상의 지탄과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아찔함을 너무도 가까이에서 체험합니다.
세상과 기독교의 싸움이 아니라 기독교와 예수교의 싸움이라는 어느 분의 말처럼 사역의 현장에서 절감하게 되는 그 속일들이 내내 보여집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기도라는 이름으로 독선적으로 흘러가 사회에 물의를 빚는 일들이 많습니다. 박경리 시인의 말처럼 ‘확신’이라는 단어가 세상을 망친다고, 삶이 결여된 종교, 양심이 멍든 신앙, 정직이 숨을 쉬지 못하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서서히 데워지는 개구리 중탕을 보는 듯합니다.

변치 않는 희망은…
세월호의 슬픔에 드리워지는 도덕적 해이를 보며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 어지러운 세간을 틈타 부조리를 일삼는 사기꾼들, 정의라는 명분으로 흩어지는 주장들로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한줄기 변치 않는 희망을 봅니다. 어린 여승무원과, 어린 여교사와, 한 학생의 용기를 보며 주 안과 밖이라는 표현을 떠나 모두가 감동하는 풍경이 희망의 노래가 됩니다.
언젠가 벗에게 “복음이 말투 하나 바꾸지 못하나!” 했더니 그가 “복음이 말투하나 바꾸지 못한 걸 못 받아주나!”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구원의 종교가 그 벽을 넘어 성숙의 종교로 더욱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늘 노래가 됩니다. 안팎으로 혼란한 시절을 지나며 여기저기 몸살을 앓는 풍경이 그득합니다. 누군가는 몸살을 ‘몸이 살려고’라고 하더군요.
이제 내가 나를 더욱 안아주고 마음의 풍경을 맑히고 밝히며 마음과 생각이 기본으로 돌아가 다만 사랑할 뿐이라는 낮음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사랑은 해의 불과 같고, 진리는 해의 빛과 같다 했지요.
며칠 후, 어느 곳 세월호 참사 추모식에서 작은 공연을 가집니다. 도무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요….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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