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대정리 두대동
엄마는 두지터라는 별명을 가진 두메산골 마을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딸들 이름에 보배 ‘보’자를 쓰고 있었는데 엄마 이름에는 도울 ‘보’가 들어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며 평생 남편 돕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신앙따라 숭의여학교로
고향 황해도 수안은 금광이 있는 산골 농촌마을로 기독교가 일찍 전파되어 여름마다 평양 신학교 전도사들이 성경학교를 열어오는 곳이었다. 엄마는 그분들의 도움으로 평양 유학을 위해 15살에 기차에 오른다. 숭의여학교 생활은 천국같이 아름답고 질서가 있었다고 했다. 푸른 잔디위의 선교사 집들과 넓은 빨래터에서 후배들이 선배의 것까지 빨아주던 광경, 기숙사 사감의 엄위하고 자상한 돌봄 얘기는 당시를 상상하게 만든다.
엄마는 산파 공부를 하며 기숙사에 머물다 숭의여학교가 신사참배거부로 자진 폐교함에 따라 평양 하숙집으로 옮기게 된다. 장대현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하며 신랑을 찾던 중 하숙집 주인의 소개로 일본서 귀국한 신식청년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우리 아버지와 62년간 해로하며 2남 4녀를 낳아 기르면서 엄마는 ‘책임감’과 ‘인내’로 살았을 뿐 아니라, 고향서 남하한 형제, 자매들의 가족까지 근처에 모아 그야말로 대가족의 중추 역할을 해온 외유내강의 여인으로 살았던 것이다.

믿음과 적극적 수고로 이룬 이민생활
1986년 10월, 언어와 문화가 다른 호주에 환갑을 넘긴 나이로 이민 와 한 번도 후회하는 말없이 30년을 살아온 것은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신앙에,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세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엄마는 특히 ‘배움’에 욕구가 커서 최근까지 성경과 함께 영어 동화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이 이민 온 사람의 예의라고도 했다.
엄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생활 자세로 몸단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스스로 화장실 출입과 몸을 깨끗이 하고자 기도하며 노력해 실제로 그 소원을 이루었다.

회개로 마무리 된 인생
일제 암흑기에 태어나 북에서 남으로 이주하고, 전쟁을 겪으며 고향 부모와 단절되고, 여섯 자녀를 낳아 기르며 어려운 시대를 지내온 엄마의 삶은 호주에서 해피엔딩을 맞는다.
큰소리 한 번 제대로 쳐 본일 없는 연약한 여인, 넉넉지 못한 형편 속에서도 우리 형제들이 “home sweet home”으로 기억하게 해준 것은 엄마의 찬송과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 하구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지난 주간 오빠는 우리 가족 그룹 채팅방에 문자를 띄웠다.
“엄마가 지난 밤 세 시간을 내리 회개만 하셨다고.”
그걸 보고 깨달았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을 정결해진 상태로 데려가시길 원하시는걸.
그리고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어지자 손가락으로 “주님”이라고 썼다. 주님 붙잡고 살라는 유언이 된 것이다. 미리 마음으로 대비하고 감사하며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지만 가슴이 멍한 것은 엄마를 떠나는 자녀의 두려움이었다.
아프가니스탄 격언에 “노인이 한 명 세상을 떠나는 것은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듯이, 일제 하에 태어나 전쟁과 정변을 겪으며 신앙을 이어간 엄마의 스토리는 이렇게 문을 닫았다.


전영혜
80년대 크리스챤신문과 기독공보의 기자로 한국교회 현장을 뛰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남편을 따라 영국과 미국에서,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살며 아름다운동행에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글을 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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