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은 결혼할 무렵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깊은 우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류를 떼어 보다가 아버지가 이북에서 결혼한 경력이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자식도, 그러니까 배다른 형제도 둘이나 있다는 사실. 이런 큰일을 30년 동안을 모르고 살아온 것도 놀라웠지만 아버지의 인내와 엄마의 속 깊음도 다시 보였다.
아버지는 공부를 좋아하고 명석한 분이었지만 곧잘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우울한 모습을 보이곤 하셨다. 살면서 가졌던 몇 가지 의문이 연결되었다. 어려서부터 친척 왕래가 별로 없었던 우리 집, 명절이면 아버지가 아침 일찍 혼자 나가시던 생각이 났다. 그럴 때 엄마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시던 모습 -아마도 아버지는 명절에 휴전선 근처 망향의 집이라도 가셨나보다.
선영 씨는 아버지 공부방에 걸려 있던 달력이 생각났다. 어떤 여자 배우 달력이 그 방에 어울리지 않게 달려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북에 두고 온 아내를 닮은 얼굴이었다고 엄마가 대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쓸쓸한 얼굴을 한쪽에 가린 채 돌아가셨다.
이산가족 상봉이 몇 차례 있어도 이름조차 낼 수 없었을 아버지의 마음이 문득 느껴진다. 전쟁으로 헤어진 부모와 형제는 50년이 지나도 얼싸안고 만날 수 있지만, 부부가 만나는 건 본 기억이 별로 없지 않은가. 긴 세월이 흐르며 새로 시작한 삶에 서로 어떤 영향을 주거나 받을 수 없어서.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평양이 고향인 전 씨는 30년 전 이민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그곳 시민권을 얻으면 북한 방문을 할 수 있대요. 살아 있을 때 고향 한번 가봐야지요.”
직장에서 은퇴하고 아들을 따라 한국을 떠난 전 씨는 몇 년 후 시민권을 받고 곧 북한 사무처에 가족 생사확인을 요청했다.
어머니와 형님은 돌아가셨고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답변이 왔다.
“여옥이, 우리 막내 얼굴과 비슷한 동생 여옥이.”
몇 살에 헤어졌나 꼽아보니 지금의 막내 딸 나이 비슷한 때였던 거 같다.
전 씨는 다시 연락했다. 어떻게 지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한참 만에 온 답장은 “잘 지내왔는데 요즘 몸이 아파 돈이 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얼마 만에 찾은 동생인데’ 하며 전 씨는 얼마를 넣고 사진도 동봉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 씨는 기대와 흥분으로 언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오는 편지의 글씨체가 바뀌며 이젠 힘들어서 대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사진을 보내라 하니 오래된 듯 보이는 낡은 사진이 왔다. 가족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얘기하지만, 아프다는 동생을 이 상황에서 다시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전 씨는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신청서를 냈다.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고향땅을 밟으려면 동생이 살아있을 때 가는 게 좋겠다”며.
그러자 연락이 왔다. 동생이 사망했다고.
전 씨는 앓아누웠다. 지워진 기억을 찾아서 얼마간 둥둥 떠서 지내는 것 같았는데 길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에선 그간의 편지나 아프다고 돈을 받은 것도 다 제삼자였을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동생이 살아 있었다는 것도, 지금 죽었다는 것도 믿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전 씨는 몸살을 한바탕 겪고 일어나면서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했다”고 마음을 추슬렀다.


전영혜
80년대 크리스챤신문과 기독공보의 기자로 한국교회 현장을 뛰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남편을 따라 영국과 미국에서,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살며 아름다운동행에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글을 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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