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을 잘하는 주희는 예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유학길에 올랐다. 영어공부와 예비학교를 거쳐 영국 왕립음악원을 마치고, 보스턴에 있는 음악학교에 들어가며, 주희는 성실함을 인정받았고 바이올린 연주만 잘하면 그게 효도였고 인생 성공으로 보였다.
그랬다. 형제 가운데 아들도, 맏이도 아닌 중간 딸이 고가의 악기를 구입해 5년 이상 유학생활을 하는 건 온 가족의 배려와 뒷받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기에 주희는 오로지 연주에 집중했다. 어렸을 때 소질을 보인 이후 20대 중반까지 악기 하나를 들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달려오며 조금만 더하면 된다고 매일의 연습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다녀가신 어머니가 아프다고 연락이 왔다. 집에 오라고.
학기 중인데….
급하게 비행기 표를 마련해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두셨다.

팔이 안 올라가요
50대의 그 어머니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주희의 음악 선배였고, 앞으로 딸 연주 여행의 매니저를 해야 할 분이었다. 그동안의 학교 선택이나 학업에도 누구보다 앞선 식견으로 인도해 오신 특별한 엄마였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애에 젖어 주희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가늘고 긴 팔과 손가락 끝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더 애처로웠고,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남은 한 학기를 마쳐야지?”
“왼팔이 안 올라가요.”
바이올린 연주야말로 왼손 오른손의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왼팔이 굳어져 버린 듯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다. 충격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지.
학교를 휴학하고도 감각을 잃지 않으려 나름대로의 연습은 쉴 수 없었다.
추운 동네 보스턴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사흘이 멀다 하고 눈이 오고 또 왔다. 아, 한 손을 제대로 못쓰고 엉거주춤 학교를 오가던 주희가 넘어지고 만 것이다.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몇 주 동안 꼼짝할 수 없이 되었다.
마음은 차가운 바다처럼 시리고 한쪽 팔, 다리마저 뻣뻣한 채로 그 겨울을 지내며 주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에선 그의 고독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고 연주자가 되어 세계무대에서 연주하려던 꿈은 접어야 하는가’, ‘이제 직업을 찾아 나서야 하나.’
아르투르 그뤼미오를 닮은 그의 낭만적인 연주는 어둠에 가둬지는 듯했다.
꼬박 일 년을 물리치료와 엄마 잃은 공허함 속에 지내다 주희는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할 거예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할 거예요.”
그로부터 그가 신앙에 전념하는 모습은 마치 사역자로라도 나가려는 듯 보였다. “음악박사과정을 공부해서 가르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겠어요”라며 분위기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다시 길고 치열한 공부를 시작한 주희는 앞만 보고 나갔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매주일 예배 반주를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음악 최고학부 전공자가 매주 예배에 봉사하는 일은 여러모로 힘든 게 많은데 해내고 있었다.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주희도 주변 소개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상대방 부모가 이쪽에 어머니가 안 계신 것을 문제 삼아 틀어지는 경험도 하며 또 다시 아픔을 감싸 안아야 했다.

12월에 온 소식
그러던 몇 해 전 12월,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30대 후반의 동갑인 과학자 교수가 주일마다 성실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주희에게 다가와 만남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치 청교도 같은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만난 순간 전율을 느끼며 확신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흔히 말하는 조건을 잘 갖춘 데다 영화배우 다니엘 헤니까지 닮은 남자를 만난 주희의 스토리는 보스턴 한인 유학생들에게 순식간에 퍼졌다.
“걔, 엄마 돌아가셨을 때 팔 다리 못쓰고 우울했던 얼굴 기억나지? 그땐 진짜 쟤 어떻게 될까봐 정말 걱정스러웠었는데… 교회 열심히 다니더니 저렇게 백마 탄 왕자 만날 줄이야!”
어떤 사람은 외로움과 혼란 속에 하나님을 붙잡고 인내한 친구가 받은 축복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도 했다.
주희 집에 다녀온 아버지는 “둘이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한마음으로 가정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의 눈물이 날 정도”라고 하셨다.
그 후 주희는 매우 늦은 결혼이었지만 바로 아들 딸 낳으며 자녀양육에 전념하다 대학교수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영혜
80년대 크리스챤신문과 기독공보의 기자로 한국교회 현장을 뛰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남편을 따라 영국과 미국에서,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살며 아름다운동행에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글을 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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