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 VS ‘소원’

가족.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고 포근한 이름이다. 하지만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거나 가정이라는 안정된 울타리가 외부적인 사건에 의해 깨어질 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충격은 배가된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요즘 충무로에는 가족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야기들이 속출한다.

영화 속 위태로운 가족
배우 손예진과 김갑수가 주연을 맡은 영화 ‘공범’(감독 국동석) 속 가족 또한 위태롭다. 평생 딸만 바라보고 살아온 ‘딸 바보’ 아버지인 순만이 15년 전 벌어진 유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딸 다은과 아버지 사이에는 신뢰가 깨어진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딸과 그런 딸에게 서운함을 내비치며, 결백을 주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아버지를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딸과 그런 딸을 진정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모습은 평범한 가정의 ‘부녀’ 관계를 통째로 흔들며, 관객들을 혼란 속에 빠뜨린다.
이처럼 ‘공범’ 속 가족이 내부적인 요인에 의한 갈등이라면, ‘소원’(감독 이준익) 속 가족은 외부적인 사건에 의해 흔들린다. 어린 딸이 성폭행을 당한 이후 주인공 동훈(설경구)의 가족은 그 동안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때론 지루하기조차 했던 평범한 일상을 몽땅 잃어버린다. 아버지는 딸(이레)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딸을 범한 범인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떤다. 하지만 어린 딸은 자신을 돌보기 위해 다가오는 아버지에게서 성폭행범의 공포를 떠올리며, 아버지를 밀쳐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동훈은 끝까지 딸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마음의 벽을 허문 딸을 품 안에 안게 된다.

‘사건’ 앞에 선 가족들
먼저, 영화를 만든 두 감독의 변(辯)을 통해 영화의 출발 지점부터 함께 따라가 보자.
‘공범’의 국동석 감독은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는 시시각각으로 경악할 만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 만약 우리의 가족이 그 사건의 범죄자라면, 또한 그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가정에서 시작한 영화”라고 밝혔다. 그리고 영화 대사에도 나오지만, 강력범죄 특히 아동, 여성, 노인을 상대로 한 범죄에는 반드시 공소시효(범죄행위가 종료한 후 그 범죄 혐의자의 도피 등으로 인해 검사가 일정 기간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 국가의 소추권(형벌권을 소멸시키는 제도)가 없어져야 한다는 감독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소원’의 이준익 감독은 아동 성폭행이라는 주목받을 ‘소재’ 때문에 영화를 찍지 않았다.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 즉 반드시 다루어야 할 주제 때문에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실화를 소재로 한 ‘소원’은 상처는 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낱낱이 들춰내서 치유해야 한다는 감독의 철학에서 출발했다.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상처를 이길 수 있다는 그의 삶의 태도가 영화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보통 아동 성폭행을 다루는 영화는 비열한 성폭행 장면을 클로즈업해 등장인물과 관객들 모두가 치를 떨며,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폭발한다. 그렇지만 ‘소원’은 이러한 충무로의 흥행공식을 과감하게 버렸다. 대신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에게 이중의 상처가 될까 조심하며 정말 공손하게 다가갔다고 한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 가족들이 어떻게 하면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 다시 일상을 되찾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성폭행 사건, 특히 아동 성폭행 사건의 경우에는 가해자가 아니라 도리어 피해자들이 숨어 살며, 외부에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지낸다고 한다. 감독은 이런 분들에게 평범한 일상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다. 죄 지은 듯 숨어 지내지 말고, 우리 이웃들이 도와줄 테니까 당당하게 잘 살아가라고, 그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욕망을 직면해야
기독교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감독들이 표현해낸 인간에 대한 시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가해자들만이 가증하고 끔찍한 존재일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는 죄가 없노라고, 의롭게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가정 안의 친아버지와 의붓아버지, 오빠, 친인척에 의한 성폭력은 물론이고, 동성애와 수간 등은 이미 수천 년 전 인간들에게서도 자행되었던 죄악들이다. 안 그런 척, 고상한 척 아무리 우리 자신을 포장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더럽고 추악한 욕망을 다 보고 계신다.
남의 얘기라고 치부해버리면 구원받을 길은 요원해진다.
죄 없는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찾아온 구원자는 없다. 내가 죄인인 것을 처절하게 고백하지 않고서 찾아오는 공짜 구원은 가짜이다. 희망의 빛은 언제나 처절한 절망 끝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김서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과를 졸업(M.Div)하고 안산 동산교회 큐티지 ‘큰숲맑은샘’에 영화 관련 글을 연재했다. 현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석사(Th.M)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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