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애까지 대학에 들어가니 설아 씨는 한 짐을 내려놓은 마음이었다.

“이번 생일엔 좀 좋은데 가서 식사합시다.”

흔쾌히 응하는 남편과 함께 강물이 보이는 레스토랑을 찾아 모처럼 분위기를 누렸다.

마침 해가 지며 어두워지는 가을 저녁, 좀 이른 시간인지 한가한 덕분에 애피타이저가 서비스로 제공됐다. 잉크를 풀어놓은 듯 저녁 색이 짙어지는 창가,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622번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아?”

애들 얘기, 인생 얘기를 해가며 긴 저녁식사를 했다.

“이제 일어나야지.”

늦은 10월 밤, 시내를 벗어난 교외는 캄캄하고 차가왔다.

“전화 오네.”

“아버지가 입원이요?” 정신을 가다듬어 보지만 설아 씨의 가슴은 콩콩 뛰었다.

그러니까 두 달 후면 아버지는 90세, 그동안 감사하게 잘 살아오신 거다. 국제전화로 입원 소식이 온건 예삿일이 아니고.

“바로 가봐야 할 거 같아”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차를 탔다.

‘영화 장면처럼 생일 파티를 마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가?

설아 씨는 아버지한테 달려가는 10시간의 비행 중에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정리해보는 아버지….

 

내 생명의 고향인 아버지. 내가 가진 것의 주소인 아버지. 아버지는 특별한 사랑으로 내 삶이 밑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계속 걸어갈 힘을 주셨어요. 학교를 낙방해 주저앉았을 때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밀어 줄 테니 쭈그러들지만 말아라’ 하시던 말씀은 제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그런 믿음 속에 저는 다시 일어났고, 별로 내놓을 것 없는 모습인데도 아버지는 늘 좋아해 주셨지요.

어릴 때 놀다가 씻지 않고 잠든 날, 대야에 따뜻한 물을 가져다 손을 담가 주시고 손톱과 거스러미도 안 아프게 잘라주셨지요. 잠결에 참 좋았어요. 20대 어느 겨울밤엔 발이 꽁꽁 얼어 늦게 돌아와 뒤척이며 잤는데 아침에 보니 아버지가 새벽부터 따스한 물수건으로 발을 보듬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들이 쑥덕거리며 남의 말 하는걸 보면 함께 자리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며 ‘건설적인 말들 하라. 건설적인 말’ 그러셨지요.

아버지! 잃고 싶지 않은 나의 든든한 담입니다.

전화 통화할 때면 ‘참 재미있구나. 네 얘기’ 하시다가 나중엔 ‘하나님 은혜가 감사하다’고 울먹이셨고.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벌써 눈을 뜰힘이 없으셨다. 모든 얘기에 “응”이라고만 하시더니 일주일 되는 날 숨을 멈추셨다.

“아버지, 아버지. 정말 고마웠어요.”

그날 이후 설아 씨는 생일이 되면 아버지의 마지막이 떠올려진다.

또 가을이고 생일이 온다.

벌써 몇 해가 갔어도 그 날의 기억은 시린 느낌으로 남아있다. 영화에서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 이어지면 곧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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