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새롭게 풀어내는 생명 재탄생이야기

우선 참으로 단순합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 받을 수 없는 우주공간에서 조난당했다가 지구로 귀환하는 이야기. 얼굴 내밀고 출연하는 배우가 달랑 두 명뿐이라, 인물 간의 갈등이나 화해 같은 플롯도 없습니다. 영화 내내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척 복잡하게 꼬여 있습니다. 아버지 5+1명, 어머니 1+1명을 가진 남자아이의 비극적 운명에 관한 이야기. 정신분석학적 상징과 갈등이 넘쳐흘러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게다가 살부(殺父)를 다루고 있어요. 물론 무겁지요.

바로 요즘 대한민국 극장가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그래비티’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이 두 영화가 자신만의 화법으로 나란히 ‘생명의 재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수정과 탄생의 구도 ‘그래비티’

먼저 ‘그래비티’. 딸이 사고로 죽은 이후, 심한 우울증에 빠져 살던 라이언 스톤 박사. 그런 그녀가 우주공간에 떠 있는 허블망원경 수리에 투입됩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그녀가 놓인 우주는 죽음의 상태와 가장 유사한 공간입니다. 우주가 좋은 이유를 물어보는 동료의 질문에 그녀는 우주의 그 고요함이 맘에 들었다고 답해요. 세상사로부터 떨어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본능)에 빠져 있던 그녀가 이제 우주라는 죽음과 근접한 공간에서 그동안의 적막을 깨고 살고자 사력을 다합니다. 살려는 삶의 본능, 즉 에로스(Eros)를 향해 돌진합니다. 영화는 이걸 수정과 탄생의 구도로 그려내고 있어요.

우주공간을 떠도는 라이언 박사에게서 정자(精子), 그녀가 들어가려고 하는 우주정거장에게서 난자(卵子)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여성인데 정자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요? 동료가 다시 그녀에게 묻습니다. 여자인 당신은 왜 라이언이라는 남자이름을 가졌느냐고. 남자이름을 가진 그녀가 우주정거장에 들어가는 순간 그동안 성별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던 우주복을 벗고, 아름다운 여성의 육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마치 자궁 속 태아처럼 한참을 웅크리지요. 지구로의 출산(出産). 이 세상, 아니 지구에 도착한 그녀는 마치 양수에서 빠져나오듯이 물속을 헤쳐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유아처럼 힘겹게 기어가다,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해요. 죽음의 공간에서 헤매던 그녀가 재탄생하는 순간이에요.

 

현대판 오이디푸스 ‘화이’

그리고 ‘화이’. 5명으로 이뤄진 ‘낮도깨비’라는 범죄 집단은 14년 전 남자아이를 납치해 자신들의 아들로 키우며 그 아이에게 범죄기술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자란 화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아이입니다. 교복을 입고 있지만, 학생은 아니며, 아버지가 많지만, 진짜 아버진 그 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출생은 없고 모호한 성장만 있을 뿐입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을 키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왜 자길 키웠느냐고. 부(父) 역할을 하는 사람 중에서 화이로부터 유일하게 아빠가 아닌 아버지로 불리는 석태는 비록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속은 불안합니다. 정체불명의 악(惡)에 사로잡힌 석태는 자신과 똑같은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자신과 다를까봐 노심초사해요. 그게 무시무시한 광기로 표출되고요. 그가 마지막에 흘리는 눈물은 화이의 최종 선택에 대한 안도 혹은 기쁨의 표현인지, 그 반대로 헛됨에 대한 회한인지 모호합니다.

화이는 꼬일 대로 꼬인 카오스의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로 재탄생합니다. 자신이 배워온 죽음을 부르는 기술로 또 다른 생명을 살리려고 몸부림칩니다. 프로이드가 말한 거세 공포, 즉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공포에 굴하지 않고 어머니를 향해 달려가는 화이는 현대판 오이디푸스 그 자체입니다.

 

몰입과 거리 두기를 요구

전자가 인간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경이에 가까운 확률과 신비를 빗대어 압도적인 우주를 체험케 한다면, 후자는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다면성을 공포와 잔인함으로 낯설게 만듭니다. 따라서 ‘그래비티’는 몰입을, ‘화이’는 거리 두기를 각각 요구해요. 만약 그 반대로 접근한다면 황당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비티’를 객관적인 매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과학적인 오류로 범벅된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또한 ‘화이’를 감정 이입해서 본다면 불쾌감과 찝찝함을 한 아름 껴안게 됩니다. 혹자는 윤리적으로 쓰레기 같은 영화라고 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화되어 바라본다면 ‘그래비티’에서 절망 가운데 소망을, 죽음 가운데 삶을 노래하는 자신을 찾을 수 있지요.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화이’에선 다름을 용납지 않는 인간의 자기 복제 욕망, 그리고 어그러진 권위의 억압과 규범적인 폭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자유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비티’의 중력, ‘화이’에서의 부모님의 기다림과 같은 끌어당김에 끌려가기 위해 나아가면서 두 영화 주인공 모두 이전의 상처와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습니다. 공허함이나 막연함을 묵직하게 채워나가면서 말이지요.

 

임택

미국 오하이오대학교 영화과 석사과정과 동대학 Interdisciplinary Arts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영화이론 및 미학을 수학하였다. 현재 단국대·인하대·국민대·홍익대·명지대 등에서 영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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