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가진 자의 불안감, 못 가진 자의 비참함”

도시 괴담에서 출발

미국에는 어반 레전드(Urban Legend)라고 불리는 도시괴담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특성을 반영하듯 차 또는 여행과 관련된 괴담이 꽤 많은 편입니다. 예를 들어 비 내리는 어두운 밤에 홀로 차를 몰고 가다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에 들르게 되는데, 거기서 자신을 납치해 가두려는 수상한 주유소 주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를 피해 필사적으로 차를 몰고 도망쳐 나오는데, 멀리 사라져 가는 차를 향해 그 주인이 이렇게 외칩니다. “뒷자리에 누군가 숨어 있어요!”

있을 법한 현실성 때문에 이런 도시괴담은 관객의 흥미를 끌 만하지요. 영화 ‘숨바꼭질’ 소재 또한 그렇습니다. 사건·사고를 우리 주변의 흔한 상황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살이 더해지고 스토리텔링이 들어가면서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몇 해 전 일부 지역 아파트에 낙서 같은 암호가 남겨져 있어 그 낙서를 두고 온갖 추측이 오고 갔었지요. 누군가 뭔가 의미가 있는 듯한 표식을 내 집 문에 남겨놓는다면 결코 그냥 흘려버릴 수 없을 겁니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거기에 집주인 몰래 괴한이 집에 사는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뭔가 꺼림칙해서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외출했더니, 거기에 천연덕스럽게 자기 집인 양 활보하는 누군가가 찍혔다는 이야기.

‘누군가 나를 관찰하고 있고, 나도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막연한 불안감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관객의 공포심을 자극합니다.

 

아파트, 그 모순의 공간

성수는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부모님 재산을 물려받아 고급 카페를 운영하며 고급 아파트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이 살던 빈민 아파트를 찾아가게 되면서, 위기가 닥칩니다. 집집이 초인종 옆에 남겨 있는 수상한 암호, 비밀 통로를 통해 옆집과 연결된 아파트 구조, 친절한 듯하지만 때론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모녀 등. 그러면서 숨겨졌던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나지요.

성수는 자기 아파트로 들어가면서 따뜻함을 느낍니다. 그곳은 가족이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거기엔 대화가 있고 정서적인 교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비어있는 형의 아파트에 들어가서도 사라진 형이 남긴 진실과 무언의 소통을 합니다.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외부와는 격리, 즉 차단되어 버리지요. 개인 공간에 대한 방해나 침입은 곧 공포입니다. 아파트라는 곳이 소통이면서 동시에 격리라는 모순의 장소인 거지요. 그래서 아파트 내부를 보는 시선과 외부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한 온도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영화 ‘숨바꼭질’의 중심에는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의 의미는 단순한 거주 공간 이상으로, 우리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시작과 끝입니다. 한국사회의 지표이고, 개인의 신분이고, 욕망의 근원이지요. 한마디로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인 셈입니다.

특히나 전세 값 폭등으로, 더 고달픈 메뚜기 삶을 감내해야 하는 현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피부 깊숙이 다가옵니다. 영화 속에선 필사적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지키려고 합니다. 또 누군가는 거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영화가 강요하는 시선은 자칫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위협하는 자는 분명 악당이고, 그의 행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어요. 하지만 서구 공포 영화에서 백인 가정을 위협하는 (흑인 혹은 타문화권 인종과 유사한 모습의) 괴물·괴한을 통해 인종차별적인 시선을 고착시켰듯이, ‘숨바꼭질’ 또한 그 유사한 방식을 답습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그리고 못 가진 자를, 혹은 (세입자·무주택자로서) 아직 못 가진 상황을 편견의 시선으로 고정시켜 극화합니다.

물론 ‘숨바꼭질’을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보수 혹은 기득권층에 대한 풍자코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수는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형을 몰아내고 부를 독차지했지요. 그래서 다시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강박증의 형태로 나타나는 인물입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사회 기득권층이 자리 잡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우리네 과거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지요. 그런데 한국사회가 대충 넘어가고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에 매몰되었듯이, 성수의 사죄 또한 스쳐 지나가듯 잠깐 나올 뿐, 공포와 반전에 묻혀 이내 퇴색됩니다.

‘숨바꼭질’을 보며 어떤 관객은 안락을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관객은 부요함으로부터의 이질감을, 더불어서 전자의 관객은 자신이 못 가진 자를 얕잡아 보는 시선을, 후자는 자신이 벌레 취급받는 상황을 각각 발견하게 됩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동상이몽.

영화에서 보여준 아파트에 대한 집착이 낳은 참극이 묘하게 현대 교회의 비극과 오버랩 됩니다. 일상의 만남에선 기독교적 동지의식을 나누지만, 일단 교회라는 건물 속에 갇혀버리는 순간 바로 등 돌려버리는, 또 규모로 판단하고 자학하는 시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모습 말입니다.

 

임택

미국 오하이오대학교 영화과 석사과정과 동대학 Interdisciplinary Arts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영화이론 및 미학을 수학하였다. 현재 단국대·인하대·국민대·홍익대·명지대 등에서 영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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