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도 감사의 꽃은 피어납니다”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하지 아니하며/ 살아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아니하며/ 살아있는 일에 탐욕하지 아니하며/ 나의 나됨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내 안에 살아 있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김소엽 ‘오늘을 위한 기도’ 중에서

맑고 고운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타고 흘렀다. 목소리 위에 은은한 커피향이 배어들었다. 시가 갖고 있는 감성(感性), 그 오롯한 울림이 성대의 떨림을 통해 공간 속으로 퍼져나갔다. 작은 하나의 물방울이 무수한 동심원을 만들어내듯, 하나의 목소리가 가슴에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낭독의 힘이겠지….

하지만 이 ‘낭독’이라는 단어는 서서히 ‘죽은 단어’가 되고 있다. 몇 년 전, 한 텔레비전 방송국이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시와 함께 낭독은 쓸쓸한 잊혀짐의 시간을 걷고 있다.

 

김소엽 시인에게 헌정한 시 낭송집

김예소리 찬양선교사(번동제일교회)는 그런 잊혀져가는 기억들을 여전히 붙들고 있다. 지난 7월 고희를 맞은 김소엽 시인(대전대 석좌교수·한국기독교문화예술총연합회장)의 기념문집 출간에 맞춰 김 선교사는 CD로 제작된 시 낭송집을 헌정했다. 이 낭송집에는 김소엽 시인도 직접 참여해 자신의 시 ‘꽃이 피기 위해서는’을 낭독했다.

 

꽃이 그냥 스스로 피어난 것은 아닙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햇빛과 물과 공기가 있어야 하듯이/ 꽃이 저 홀로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꽃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벌과 나비가 있어야 하듯이…

 

꽃이 피기 위해서는 햇빛과 물과 공기가 있어야 하듯이, 김 선교사가 시 낭송의 길로 들어서기까지는 이강철 시인(시 낭송가·전 한국시낭송가협회장)과 김소엽 시인이 필요했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네요. 방배동에 ‘랑데뷰’란 시 낭송 카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시 낭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랑데뷰를 운영했던 이강철 시인과 김소엽 선생님을 통해 시에 대해 배우고 시 낭송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육체적 장애로 절망

김 선교사는 사실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약간의 시력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저 간신히 사물의 형태와 색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심한 약시이다. 아기 때 엄마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부모님이 병원에 데려갔을 때는 이미 시신경 위축으로 안경이나 렌즈가 무용지물인 상태였다.

“어린 시절엔 눈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수업시간에 필기를 안 하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 선생님들에게 왜 필기를 안 하는지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하려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의 노트를 빌려 밤새도록 필기를 해야 하고,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될 때면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란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수련회서 만난 하나님

육체적인 장애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김 선교사가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영락기도원에서 진행된 여름 수련회에서 김 선교사는 ‘주님을 만났다.’

“그 수련회에서 처음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목사님이 커서 주님의 일을 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을 때 울면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결단한 거지요. 정말로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국악예고와 한양대 음대를 졸업하고 음악 교사를 꿈꿨지만 육체적인 장애가 발목을 잡았다.

“교생 실습까지 다 마쳤는데 막상 교사로 가려고 하니 학교 측에서 받아주지를 않았습니다. 시력이 너무 약해 수업하는데 지장이 있고 학생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정말 좌절했습니다. 그렇다고 무대에 설 수도 없었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무대까지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오직 절망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력을 이렇게 약하게 만들었으면 최소한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열어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던 시절이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30호 이수자

김 선교사는 사실 육체적 장애만 빼면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다. 지금은 작고한 인간문화재 김월화 선생으로부터 국악을 사사 받은 중요무형문화재 30호 이수자이고, 서초구 시낭송대회 우수상을 비롯, 대한민국 문화예술선교회 주최 시낭송대회에서 우수상을 받는 등 크고 작은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았다. 또 동화구연까지 공부해서 자신의 사역 영역을 꾸준히 넓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 안내견 코미를 앞세워 집회를 나가면 늘 불안한 시선이 따라 붙는다.

“성경 말씀을 시조로 풀어내는 국악 찬양을 해요. 거기에 시 낭송과 동화구연도 곁들이는데,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립니다. 그 시간 동안 안내견 코미는 의자 밑에 앉아서 꼼짝도 않고 기다립니다. 집회가 끝나고 나면 목사님들이 너무 신기해하세요. 어떻게 개가 그렇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느냐며.”

집회 내용보다는 안내견에 초점이 맞추어진 듯한 이런 대화는 사실 좀 이상하지만, 육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여전히 한 곳에 고정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서글픈 증거들이다. 우리의 시각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자연스러움에 자꾸 시선이 끌리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믿음의 본질

김 선교사는 최근 집회가 많이 줄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교회도 힘들기 때문에 강사를 초청하기 보다는 교회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국악 찬양이나 시 낭송 같은 사역의 형태가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마음만은 늘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시대의 흐름에서 왠지 자꾸 한편으로 밀려나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한때는 분명 ‘시의 계절’이 있었고, 국악이 대접을 받고 문학이 문화의 핵심 아이콘으로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심히 흘러갈 뿐이다. 무엇 하나 이것만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인간 세상 속에는 없다. 하지만 그 무상함 속에서 ‘참다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인의 몫이다.

“내게 아주 조금이지만 그 시력이 남아 있는 날까지는 찬양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요. 김소엽 선생님의 ‘오늘을 위한 기도’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며/ 부유해도 오만하지 아니하며/ 모두가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아니하며/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란 구절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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