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을 뚫고 달리는 열차, 구원을 이야기하다 ”

“우리는 엔진의 노예가 아니다!” 17년을 기다린 꼬리 칸의 반란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2014년 7월 1일,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해 인류는 ‘CW-7’이라는 기후 조절 물질을 살포하지만, 부작용으로 인해 지구에는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한다.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는 노아의 방주처럼 생존자들을 태운 기차 한 대만이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빙하기로 인해 1년마다 지구를 한 바퀴씩 순환하는 설국열차만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지역이 된다.

기차 안에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꼬리 칸과 선택된 사람들이 초호화판 향락을 즐기며 문화를 향유하는 앞쪽 칸이 서로 공존하고 있다. 열차 안의 세상은 한마디로 앞쪽 칸을 위한 통제와 절대 계급사회이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17년이 되던 2031년, 꼬리 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마침내 긴 세월 준비해온 반란을 실행에 옮긴다. 커티스를 앞세운 꼬리 칸 사람들은 더 이상 노예적 삶을 살 수 없다며 절대 권력자인 윌포드(에드 해리스)가 있는 엔진 칸을 향해 질주한다.

 

두터운 마니아층 형성

설국열차의 영어 제목은 열차가 송곳처럼 눈을 뚫고 나간다는 뜻의 ‘Snow piercer’로, 원래 프랑스어 제목은 ‘Le Transperceneige(눈꽃을 뚫고서)’라는 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2004년 겨울, 영화 ‘괴물’을 준비할 당시 봉준호 감독은 우연히 홍대 앞 단골 만화집에서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를 발견했다. 만화에 묘사된 신세계에 전율한 그는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2000)’,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등 4편의 장편영화로 국내외에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범인이 잡히지 않은 실제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다루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괴물’에서는 한강을 배경으로 한국의 수도 서울을 덮친 괴물을 만들어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외에도 힘없는 엄마를 스릴러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마더’ 등 그의 작품은 탄탄한 스토리와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호평을 받았다.

최근작 ‘설국열차’는 호불호가 엇갈리는 가운데 영화의 다양한 해석과 함께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에 대해 “설국열차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격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고 나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인간적인 측면이 있다”는 감독의 변을 기초로 해서 다음의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인간의 본질

“애초부터 나는 앞쪽 칸, 당신들은 꼬리 칸! 니들 주제를 알고 제자리를 지켜!” 이는 윌포드를 숭배하는 열차의 2인자 총리 메이슨(틸다 스윈튼)이 꼬리 칸 사람들을 통제하는 연설의 주된 레퍼토리다. 사람들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어 제자리를 충실히 지켜야 질서가 유지되고 사회가 운영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고 통제할 권리가 있는가? 성경은 절대자인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요,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계급화하거나 도구화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모독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비견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과 악의 경계는 무엇이며, “과연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설국열차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집합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입체적 인물(평면적 인물과 대비되는 인물로,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성격이 변하고 발전하는 동적 인물)은 거의 영화 막바지에 실체가 드러나는 두 인물이다. 열차의 성자로 불리는 길리엄(존 허트)과 혁명의 리더인 커티스다.

둘 다 선인(?)처럼 보이지만, 한 사람은 윌포드의 질서와 균형을 위한 동업자로서의 존경받는 지도자 역할에 충실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쫓다 삶이 극적으로 변하지만 마지막 순간 악한(?)의 달콤한 제안 앞에서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영화 말미에서 커티스는 길리엄의 본질을 확인하고는 충격에 빠진다.

이러한 커티스와 관객들의 절망에 대해 성경은 인간의 실체를 모르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출생 때부터 죄 중에 거하였고(시 51:5), 마음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며(창 6:5), 본질적으로 죽은 자요(롬 5:12),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힌 자요(딤후 2:26), 깨닫지도 분별할 수도 없는 상태(고전 2:14)에 처한 존재라는 것이다.

타락 전의 인간은 선을 행할 자유와 능력을 동시에 지녔지만, 타락 이후에는 선을 행할 자유는 있지만 실제 선을 행할 능력은 상실해버렸다. 결국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존재로 전락해버려 도무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 곧 죽음의 상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

하지만 영화의 하이라이트에는 이에 반(反)하는 윌포드의 대사가 나온다. “너(커티스)는 저들을 구원할 수 있어. 길리엄도 그들을 구원했던 거고.” 영화는 마지막에 ‘구원’의 문제를 건드린다. 생존이 불가능해진 인류에게 설국열차를 제공한 윌포드는 새로운 구세주이다. 빙하기라는 위기가 철저한 통제와 계급사회로 움직이는 설국열차를 필요로 했고, 잘못된 세계관을 가진 절대 권력자는 신이 되었다.

하지만 ‘영원하고 신성하다’고 외치던 엔진은 결국 마모되고, ‘자비롭다’던 윌포드는 꼬리 칸 아이들을 마모된 엔진의 부품 대용으로 쓴다. 윌포드는 폐쇄된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인간과 생물의 수를 조절하고 인간을 희생시켜왔다.

그럼 과연 그가 말하는 구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약자의 희생을 담보로 한 구원이요, 절대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이기적인 구원이었다. 자신은 이미 늙었다며 커티스에게 권력 이양을 미끼로 유혹하는 윌포드에게서 우리는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 구세주의 전형을 본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구원)에 관한 인류와 만물의 역사인 동시에 진정한 구세주에 대한 증거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구세주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며,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릴 때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의 완전한 회복인 것이다.

 

김서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과를 졸업(M.Div)하고 안산 동산교회 큐티지 ‘큰숲맑은샘’에 영화 관련 글을 연재했다. 현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석사(Th.M)과정을 밟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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