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 어머니를 위한 콘서트

아름다운동행 지난 156호 ‘어머니를 위한 작은 콘서트를’ 글 말미에, 알츠하이머를 앓으시는 벗님의 어머니를 위한 콘서트를 열자 했었지요. 그리고 마침 기회가 되어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다음 날 벗님의 소감이 ‘좋은날풍경’ 홈페이지에 올라와있었습니다. 자랑 아닌 자랑이 될까봐 조심스럽지만, 우리 사는 세상 여기저기에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커서 나눕니다.

 

점심 때, 잠깐 틈을 내어 마음속 염원 중 하나였던 박보영 선생님 노래를 어머니께 들려드렸다.

가사가 생각이 나시는지 어머니는 흥얼거리시며 잘한다시며 추임새에 박수까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으시고…. 오랜 병원생활 지겹고 힘든 일상이 순간 다 잊혀진 듯 선생님의 가슴 뭉클한 노래와 그 마음. 귀를 쫑긋 세우고 따라 부르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 자식이라면서도, 이렇게 행복하게 해드린 적 있었나.

누워 계시던 집중치료실 할머니들이 순식간에 소녀가 되어 침상에 앉으셨다. 어머니 옆 침상에 평소 말 한 마디 없던 조용한 할머니는 아리랑을 부르며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셨다.

노랫소리 하나에 간병인들까지도 마음의 격려와 치유를 받고 있었다. 새어나간 노랫소리에 다른 일반병실에서 할머니들과 간병인들이 원정 오셔서 어느새 병실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박보영 선생님, 오늘은 슈퍼스타 조용필보다 더 큰 스타이신데요.ㅎㅎ

병실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계시던 어머니, 할머니들.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나눌 사람이 없었네….

휠체어에 앉아 계신 94세 할머니의 칭찬은 정말 걸작이다.

“기타소리 좋다. 잘하는 선생님이야!” ㅎㅎ 할머니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으신다. 하지만 분명 선생님의 기타소리와 노래가 들렸단다. 간병인들도 난리가 났다. 앵콜에 앵콜을.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간병인들의 애환까지 보였다. 노랫소리에 흥겨워하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시며 눈물까지 흘리는 간병인의 모습. 세상에 고마운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과 실라의 노래가 되길

사실 노래하기 전, 저는 어디론가 숨고 싶었습니다. 근래에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들로 인해 흥겹게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축된 저에게 벗님의 어머니는 수시로 “누구세요? 누구세요?” 라시며 자꾸만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인 건 알지만,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사용해 주소서! 매미처럼 간절하게, 애절하게 온 몸과 온 삶을 울려 노래하게 하소서! 물티슈처럼 온전히 쓰임 받고, 인정함까지 받지 않는 저이기를 갈망합니다. 생각과 감정. 마음 구석구석까지 오로지 당신의 기쁘신 대로 마구 써주소서!’

잠시 후, 벗님이 어머니께 “어머니, 오늘 특별한 분이 오셨어요. 가수이신데 어머니를 위해 특별 공연을 해 주시려고 기타까지 들고 오셨어요”하고 말했다.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아리고 쓰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보호자가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오지 않는 아프고 외로운 영혼들이 병든 몸에 갇혀 있음이 보였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노래가 어떠했을까. 옥문을 터뜨린 그 자유의 노래.

“하나님, 오늘 이곳에서 부르는 노래가 그런 해방의 노래가 되게 하소서!”

 

아리랑,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어떤 노래를 부를까. 할머니들이 좋아하실만한 노래가 좋겠다 싶었습니다.

“아리랑, 쓰리랑”의 어원이 사랑하는 이 때문에 아리고 쓰린 감정의 어원이 있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노래, 나아가 인류의 노래, 더 나아가 어쩌면 우리가 에덴에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고개를 넘어갈 때 그런 우리의 뒷모습을 보시며 아리고 쓰린 마음으로 부르셨을 법한 하나님의 노래, ‘아리랑’을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애절하게 불렀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할머니 환우분들이 일제히 노래를 따라하시며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성경 속의 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한 소녀에게 “달리다굼” 하시며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막 5:41)’고 명하셨던 장면입니다.

노래하는 그 시간, 하늘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평안 “샬롬”이라는 히브리 단어 속에 ‘태평’이라는 어원이 있다는 글을 봤던 게 생각났습니다. 가장 완전한 평화인 ‘태평’이 모든 영혼들 한가운데 자리하길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사람 살아가는 노래, 옛 노래들을 메들리로 불렀습니다. 그리움이 향기가 되는 노래. 그런 노래를 부르던 중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새 자리에 앉아 손뼉도 치시며 노래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영락없는 십대 소녀였습니다. 어머니는 노래하는 행복한 소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알츠하이머, 머릿속 지우개가 다른 기억들은 다 지워도 영혼에 새겨진 노래는 지우지 못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간병인과 할머니

또한 간병인의 진한 눈물도 보았습니다.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나 훔치셨습니다. 박수도 위에서 아래로 해병대처럼 쳤습니다. ‘환우들의 진짜 가족보다도 더 많이 울고, 더 따듯하게 보듬어 주는 그런 사명을 꿋꿋이 감내해 가는 사랑의 실천자 같구나.’

‘간병인’이라는 다소 제 삶에 희미했던 단어가 가슴에 빛나는 별로 박히는 순간이었습니다.

놀랄 일이 또 있습니다. 휠체어에 온몸이 밧줄에 묶여 계시던 할머니. 할머니를 밧줄에 묶어두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간병인의 말이 아팠는데, 귀가 멀고 말을 못하시는 할머니가 “잘한다, 기타소리 참, 좋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간병인은 여태껏 이런 일이 처음이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고,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른 새벽에 맞이했던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 이야기를 증거하듯 말하였습니다.

그날 하나님은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아니, 알츠하이머 어머니의 아들이신 벗님의 남모를 애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이겠지요. 저는 그날 목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선 낮고 작은 영혼들을 누구보다, 무엇보다, 우선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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