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1월 5일 신학대학원 1학년 때 교회를 개척했다. 무식하니 용감하다고, 개척이 뭔지도 모르고 덤벼든 셈이다. 하지만 지난 35년의 목회 인생을 되돌아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개척교회를 시작한 곳은 서울 사당동 산20번지, 국립묘지 뒤편의 속칭 달동네였다. 명색이 서울이지만 수돗물이 안 나와서 밤중에 물지게로 공동수도에 가서 돈을 내고 물을 길러 먹는 동네였다. 그런 동네의 산꼭대기 50여 평 정도의 시유지에 흙벽돌로 벽을 쌓고 함석지붕을 입힌 녹슨 건물이 바로 예배당이었다.

바닥은 가마니를 깔고 나중에 어떤 집에서 사용하다 버린 비닐 장판을 주어다가 깔았다. 그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한여름 찜통더위에도 선풍기 한 대 구할 처지가 못 되었다. 할 수 없이 청계천에 나가 중고 환풍기를 하나 구해 예배당 천장에 달아 두었는데 예배 도중에 합선이 되어 소동을 벌인 적도 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멋진 추억이다.

 

원정임 할머니

목회 사역 중 특별히 세 가지가 기억나서 감사하고 싶다. 첫째는 원정임 할머니이다. 원정임 할머니는 남편과 아들이 죽고 자부와 두 손녀와 함께 살았던 60대 후반의 노인이다. 가난했지만 신앙생활을 통해 최고의 기쁨을 발견한 할머니였다. 판잣집에 살면서도 햇과일을 사서는 목회자인 내게 먼저 대접하셨다. 자부가 호텔 청소부로 일하는데 헌 우산이라도 주워 오면 그것을 내게 주었다.

그러다가 용인에 사는 큰딸 집으로 가셨는데 나중에는 너무 허약해서 거동을 하실 수 없었다. 한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했는데, 어느 해인가 할머니가 보고 싶어 용인으로 향했다. 가보니 할머니의 임종이 가까웠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찬송을 눈물로 부르는 중에 할머니는 두 눈을 스르르 감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나 같이 부족한 것도 주의 종이라고 세상 떠나기 전에 그토록 보고 싶어 눈을 감지 못하다가 내 손을 잡은 상태에서 주님 품으로 가셨다. 천국행도 잠시 늦추면서 나를 만나고 떠나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고, 목사로서 가장 큰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떠난 교회 재부임

그 다음은 만 7년을 섬기다가 떠난 교회로 재부임한 일이다. 동광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하면서 아무래도 제대로 목회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100여명의 성도들 앞에서 사임을 발표했다. 교회는 난리가 났다. 울고 있는 성도들을 뒤로 한 채 떠나는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평소에 존경하던 김무환 목사님이 시무하던 신장중앙교회(현 하남교회)에 가서 2년 2개월 동안 목회를 다시 배웠다.

필자가 떠난 후 후배가 목사 안수를 받고 후임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교인들의 기대에 못 미쳤는지 100명 교인이 20여명만 남고 다 떠나버렸다. 후임 목사가 사임하고 교회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교인들도 많이 지쳐 있었다. 여러 목회자가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개척한 목사가 되돌아와야 한다는 교인들의 뜻에 밀려 교인 대표 몇 분이 나를 찾아왔다.

신장중앙교회에서는 부목사로 시무했지만 담임목사님을 비롯해 온 교회가 나를 귀하게 여겨 대우도 최상이었다. 그러나 동광교회는 교회 형편이 말이 아닐 정도로 어려워서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주간 기도할 시간을 가져보겠다”고 대답했다.

기도 중에 비록 교회 형편은 어려워도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고생도 각오할 결심을 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재부임 청빙 투표 때 28명이 모두 나와 찬성 투표해서 전격적으로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부러운 은퇴

마지막으로 동기생들이 부러워하는 목회자로 은퇴하게 된 것이다. 개척 당시 동기생들이 모이면 가장 힘들고 불쌍한 사람이 나였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힘들게 보인 모양이었다.

재부임 후 산동네 철거민촌이 헐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두 번의 이전을 통하여 지금의 은천동(옛 봉천동)으로 건물을 매입해서 교회를 이전했다. 그동안 가건물과 임대건물에서 그토록 바라던 우리 교회 건물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은혜 중 잘 성장해 행복 목회를 하게 되었다.

뜻한 바가 있어 정년을 5년 앞두고 만 65세에 은퇴했다. 당회와 중직들은 정년까지 시무를 요청했다가 안 되면 2년만 더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65세 은퇴를 강단에서 선언했고, 스스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개척한지 만 31년 시무에 원로목사로 퇴직하면서 가장 조심스러웠던 것은 예우 문제였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장로님들이 먼저 의논을 해서 예우하기로 한 것을 토씨 하나 안 달고 그대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형편으로는 최선이요, 나로서는 당회와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주님의 선한 인도에 고맙고 송구할 뿐이다.

개척 당시 한 집사가 나의 열악한 목회 환경을 보고 “이 전도사는 얼마나 저주를 받았으면 이런 곳에서 목회를 하나” 하고 떠나간 적이 있다. 그렇게 가장 불쌍하고 고생하는 목회자란 평을 받던 내가 동기생들이 부러워하는 목회로 끝내게 된 것이 너무 고맙고 송구할 뿐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 고백한 바울 사도의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이다.

- 이기재 목사(감사마을연구소장·동광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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