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서신’ 저자 이미선 약사

얼어붙은 땅. 그곳은 시종일관 얼어붙은 땅이다. 밤이면 웃음도 넘쳐나고, 술도 넘쳐나고, 불빛도 넘쳐나지만 사실은 눈물도 소망도 얼어붙은 땅이다. ‘청소년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길게 드리워진 골목은 그래서 오히려 낮에는 잠들어 있는 그런 골목이다. 술과 거짓웃음에 지친 그녀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미아리 텍사스’ 성매매 집장촌. 도대체 왜 텍사스라는 이름이 붙어있는지 모르지만 그 골목에는 핸드폰 때문에 집을 나온 소녀도, 남자친구랑 헤어지라는 엄마의 말에 홧김에 가출한 아이도,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몸을 파는 어미도, 가난한 집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 딸들도 있다. 그리고 그이들의 부서진 몸과 마음을 눈물로, 또는 위로로 감싸 안아주는 현대판 사마리아인, 건강한 약국의 이미선 약사(한성교회 집사)도 그 골목에 살고 있다.
미아리 집장촌 한복판에서 약국을 운영해온 지 16년. 어린 시절 술집 언니들과 친구하며 골목을 뛰어놀던 소녀가 성장하여 약사가 되어 이곳으로 돌아온 것.
“남들은 손가락질 하는 곳이지만, 밤이면 악다구니로 싸우고 욕이 들려오는 곳이지만 저에게는 고향입니다. 그리고 손가락질 받는 그들도 다 ‘사람’이지요. 우리가 사랑하고 보듬어야 할.”
그리고 깨닫는다고. ‘깨끗한 푸름으로 빛나던 제주의 맑은 바다와 하늘이 제 고향 미아리 텍사스의 하늘과 같은 하늘이라는 것’을.
이미선 약사는 이곳에서 ‘약사 이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여기서는 죄다 이모이다. 호객 담당하는 아주머니도 이모, 주방 아주머니도 이모. 그러나 이 ‘약사 이모’는 하는 일이 다르다. 그런 이모들뿐 아니라 성매매 여성들과 동네 술주정뱅이 아저씨, 폐지 줍는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술 깨는 약을 사고, 피임약을 사고, 붕대를 사고, 모두 아프면 이곳에 들른다. 기자가 취재하러 간 날의 풍경도 어김없이 그랬다. 약을 사면서, 약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사실 자기 얘기를 한다. 내가 많이 힘들고, 지치고, 아프고, 위로가 필요하다고. 그러면 이미선 약사는 그들을 위로해준다.
“여기 아가씨들은 마음을 처음부터 안 열어요. 가족들에게 배신당하고,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기억 밖에 없거든요. 고슴도치 같이 몸의 가시를 세우고 있지요. 그렇게 1, 2년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조금씩 마음을 열지요.”
그렇게 마음 연 이들의 친구가 되어준다. 그리고 이 약사가 사랑하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친구는 그렇게 친구가 된 후 마음을 돌려 미용기술을 배우고 그곳을 떠나기도 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축복하며 보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만나는 이들과 나눈 삶의 이야기를 2010년부터 최근까지 국민일보에 ‘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서신’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하여 인기칼럼으로 사랑을 받았고, 이번에 원고를 재정리해 ‘미아리 서신’(이마고데이)이란 이름으로 내놓게 된 것.
“신문이라 원고 분량이 정해져 있어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지난해 여름 3개월 동안 다시 썼습니다.”
1961년 하월곡동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다시 미아리에 돌아와 약국문을 열기까지 이미선 약사도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다고. 그러나 그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신다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다고.
“제일 기억에 나는 친구는… 고아원에서 자랐다던 친구지요.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고, 이혼하면서 아이 양육권을 가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왔지요. 어떻게든 빨리 돈을 모아 아이를 되찾고 싶어서. 화장품도 얻어 쓰고 옷도 주워 입고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았어요. 그런데 불이 났어요.”
‘불에 탄 작은 시신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그녀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유일한 인연인 자신의 딸아이를 키우고 싶다던 그녀가 거기 있었습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온몸으로 껴안은 그녀가 거기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녀 자신의 어두운 죄를 회개하고 싶다고 고백한 그녀가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고 있을 그녀가 보고 싶습니다.’
책에는 아파도 소리 내어 아파할 수조차 없이 소외된 이들의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고 위로하며 가슴으로 써내려간 38통의 위로와 격려의 편지가 중학교 미술교사 신원선 교사의 아름답고 따뜻한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이제 이곳도 3, 4년 후면 재개발 된다네요. 그때까지는 주님이 맡겨주신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가려고요. 그리고 그 이후에는 청소년 쉼터를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이 어린 영혼들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작년에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땄거든요(웃음). 적어도 그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기쁠 때는 어두운 세상 속 보석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이다. 세상에는 강도도 있고, 그냥 지나쳐가는 레위인도 있고, 강도 만난 이들도 있지만 분명 ‘어떤 사마리아 사람’도 있다. 그래서 희망이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