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선교를 위한 후원 물품들이 하나 둘씩 도착합니다. 의료용품, 약품, 학용품, 식료품 등 필리핀 영혼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후원 물품들이 기대 이상으로 많이 모아져 비행기에 다 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행복한 고민을 시작으로 어느덧 필리핀 앙헬레스에서 나흘 째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앙헬레스의 평화로운 풍경
선교 첫째 날, 비만 내리면 물에 잠긴다는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코발트빛 하늘에 도톰한 뭉게구름은 마치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바라본 포근한 하늘과 같습니다. 길을 걷다 잠시 한 눈을 팔면 걸려 넘어질 것 같은 돌부리들이 많았고, 군데군데 패여 있는 소발자국에 고인 물에는 하늘풍경이 조그맣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가끔씩 나타나는 트라이 씨클은 시내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세워져 있는 트라이 씨클을 만져보기도 하고 자리에 앉아 보기도 합니다.
저게 집일까? 움막일까? 하는 집들이 나타났고 짓다가 포기한 것 같은 집에 지붕만 대충 덮어 놓고 사는 집들도 많았습니다. 해맑은 미소로 반겨주는 현지인들을 보노라니 왠지 모를 따뜻함과 정이 느껴집니다. 어느 집 빨랫줄에 남루한 옷들이 부는 바람에 춤을 춥니다. 사람 사는 정감이 물씬 풍깁니다. 우리는 그 집에 조심스럽게 노크를 합니다. 미소가 부자인 부부가 어린 아이를 안고 서 있습니다. 지나칠 만큼의 환대와 친절함이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저미게 합니다. 어디서 구했을까 싶을 침대 하나가 방에 놓여 져 있는데 얼마나 지저분해 보이는지 세균이 득실할 것 같아 보입니다. 부엌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가재도구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떠나라 하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고나 할까.
부엌을 나와 마당으로 향하는데 눈길을 끄는 풍경이 있습니다. 마당 구석의 선반 위에 졸고 있는 고양이와 그 옆에 멀뚱히 앉아있는 비둘기. 어찌 저리도 서로를 경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번에 ‘평화’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점점 우리의 입가엔 미소가 번지기 시작합니다. 어미 오리가 새끼오리를 데리고 마당 구석에 물이 채 마르지 않은 진흙탕에서 놀고 있습니다. 강아지도 어미 개의 젖을 물듯이 낑낑거리며 따라다니고. 마중물 우물가 옆에는 오골계들이 무리지어 있었고 그 사이에 노랑 병아리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잠시 후 장닭이 나타나 우리들 근처에서 바닥에 부리질을 해댑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집 뒤란엔 깜짝 놀랄 만큼 큰 검은 소 두 마리가 박재처럼 서있고 그 옆에 송아지들이 풀죽어 자빠지듯 온 몸에 힘을 뺀 채 누워 있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가인의 도시’와 ‘아벨의 고향’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픈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옛 속담에 ‘사흘 굶으면 양반도 담을 넘고, 도둑맞으면 지어미 품도 들춰 본다’는 말이 있듯이. 필리핀에는좀도둑도 많고 구걸하는 이들도 많지요. 그러나 제 눈엔 어두움이 보이질 않습니다. “원 달러, 원 달러”라며 거지 손 내미는 아이들 얼굴에서도 도무지 어두움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맑고 투명하게만 보입니다. 왜일까, 의문을 품는 가운데 그들 영혼에서 아련한 슬픔의 향기가 전해져 옵니다. ‘가인의 도시’와 ‘아벨의 고향’ 간의 영혼의 거리랄까. 가인의 도시에서 기갈 중이던 길 잃은 영혼이 어느 날 아벨의 고향에 이르러 낯선 오아시스를 발견한 영혼의 풍경 같은 느낌. 그날 저는 제 영혼이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슬픔으로 패이고 절망으로 드리워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아벨의 고향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가인의 도시에서 아벨의 고향에 찾아와 뭔가를 도우려고 한다는 게 참 표피적이고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아벨의 고향에는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어떤 천국의 향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눈망울을 보노라면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 무저항의 평화가 느껴졌습니다. 마치 천국이 고여 있는 듯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노라면 물질로는 지켜 줄 수 없는 그 무엇이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슬픔의 땅, 필리핀
필리핀은 한마디로 슬픔의 땅입니다. 400년 가량 스페인의 식민지로 종노릇하고, 나라 이름도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바뀜을 당하고. ‘미·스 전쟁’ 이후 고작 2천만 달러에 미국으로 매각 당하고. 게다가 독립 전까지는 일본의 식민지로 서러움을 받았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 아직도 필리핀 공무원의 80% 이상이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식민지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죠. 뼛속까지 종의 근성이 베어든 것일까요. 제가 찾아갔던 비만 내리면 물에 잠긴다는 그 마을도 제방을 쌓으면 더 이상 비에 잠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저 당하는데 익숙한 민족성 그대로 방치되어져 살아갑니다. 얼마나 큰 슬픔이 이 나라를 짓밟아 버렸는지. 필리핀의 영혼은 오로지 슬픔뿐입니다. 가가호호 방문해 그들을 위로하고 필요한 물품을 나누고 싶었는데 하나님은 그보다 더 궁극적인 뭔가를 알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앙헬레스라는 도시 이름의 뜻이 “천사들의 도시”라고 하길래 참 아름답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순수하고 아름답던 필리핀의 어린 영혼들을 식민통치국의 일방적인 만행으로 성노리개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쾌락의 요지로 물들여 놓았기에 “천사들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식민통치 잔재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고스란히 대물림 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도시 “앙헬레스”…. 너무도 너무도 아픈 도시의 이름…. 돌아오는 길에 땅거미가 절망처럼 검붉게 하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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