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인생

안 집사의 ‘또 다른 가족들’ 

시련과 고통을 통해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다. 그런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통해 눈빛이 깊어지면 좋으련만, 우리는 늘 넘어지고 깨지고 신음하며 비로소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눈뜨고 삶의 양면성을 인식하게 된다. 타는 듯한 고통과 괴로움은 그 쓴맛과는 달리 우리의 이기심을 녹여내고 타인의 통증에 비로소 공명할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얇고 투명하게 깎아낸다. 섭리의 깊이가 바로 그런 것인 모양이다.

안익태(38·백석대학교회) 집사 역시 그랬다. 꿈에서조차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사고가 그의 ‘새로운 눈’을 띄워주었고, 그 ‘눈’이 새로운 삶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 삶은 어려운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삶이고, 비록 크지는 않지만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이고, 그래서 나만의 고통에서 일어나 새로운 가족을 보듬어 안는 ‘또 하나의 삶’이었다. 그 시작은 1999년 1월 22일이었다.

방광이 터지는 사고

안 집사는 각종 전선과 케이블 전문 생산업체인 ‘한국전선’의 생산직 근로자였다. 공장에서 근무한 지 13년째, 그로서는 절대 잊지 못할 사고가 일어났다. 굵은 강철선을 감은 둥그런 나무틀을 지게차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철선을 연속해서 감아 논 나무틀의 무게는 하중만 몇 톤에 달했다. 그걸 옮기다 경사진 곳에서 지게차가 넘어지며 나무틀이 안 집사를 덮쳤다.

나무틀의 한쪽 모서리가 안 집사의 발가락과 손가락 위로 굴렀고, 가운데 부분은 배 위로 지나갔다. 엄청난 무게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으스러졌고, 방광이 터지고 골반이 뒤틀리며 깨졌다. 그런 사고 속에서 살아난 것이 오히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무려 1년간의 병원생활이 이어졌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수술을 했지만 발가락은 계속 썩어 들어가 결국 절단하고 말았다.

어린이재단 산하의 한 복지원 사무실에서 만난 안 집사는 하지만 그런 끔찍했던 기억들을 오히려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고 너무도 고통스런 기억이었지만,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비로소 ‘새로운 것’에 눈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다래모임에도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수연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수연이를 도우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게 되고 좀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이여~”

‘다래모임’은 한 회사의 직원들로부터 시작된 일종의 봉사모임이다. 1988년부터 시작되었지만, 크게 활성화되지는 않아 회원 수 17명 남짓에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은 5~6명의 소규모 모임이다. 이 모임은 회원들의 회비로 소년·소녀 가장들처럼 불우한 청소년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 안 집사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수연이를 만났다. 그렇게 시작된 안 집사의 수연이 돕기는 무려 8년째 계속되고 있다.

“제가 손재주가 좀 있습니다. 그래서 수연이네 집에 가면 이것저것 손을 봐주거나 문제가 있는 부분을 고쳐주지요. 짬짬이 들러서 해주고 있습니다. 집이 낡아서 손 볼 데가 많습니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 늘 물을 끓여서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래모임에서 순간 보일러를 사드렸습니다.”

안 집사는 단순히 학비와 같은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남자의 힘을 필요로 하는 각종 집안일까지 도맡아 처리해주고 있다. 쌀도 사다 날라주고, 연탄도 옮겨주고, 전기도 손봐주고, 보일러도 설치해주고, 그야말로 마음씨 고운 ‘수연이네 삼촌’이었다. 천안의 한 시장 인근에서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내다 팔고 있는 수연이 할머니는 안 집사가 나타나자 손을 꼭 잡고 “내 아들이여~” 하고 말했다. 안 집사가 수연이 가족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호칭이었다.

 

아르바이트 십일조

안 집사의 수연이 돕기는 결코 경제적인 여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고 이후 안 집사는 이런저런 ‘아픔’을 많이 겪었다. 사고로 본인은 5급 장애인이 되었고, 동생은 우울증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그 외에도 개인적인 여러 아픔들과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따랐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손재주가 있어서 이걸 활용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게시판에 광고를 붙였습니다. 전봇대에도 프린트해서 붙였습니다. 이게 효과가 있어서 제법 일거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안 집사는 복직한 직장에서 2교대 근무를 한다. 야간조 근무를 마치고 나와서는 방충망을 고치거나 집안의 여러 설비들을 수리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의 십분의 일을 어린이재단 산하의 한 복지관에 후원금으로 내고 있다. 교회에 하는 십일조 외에 ‘또 다른 십일조’로 남을 돕고 있는 셈이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스스로 자부심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설비 일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쁨이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제가 돕는 영역을 좀 더 넓히고 싶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은 욕심도 생깁니다.”

안 집사는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다. 회사에 출근해 생산 작업장에서 일하고, 퇴근해서는 설비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리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식당 봉사일을 한다. 그 짬짬이 수연네 집을 들러 이것저것 살펴봐주고 복지관에 나가 후원금을 전달하고 이것저것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교회에서 식당 봉사일을 하면 얼마간 밑반찬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그것을 봉사자에게 나눠 줍니다. 그러면 그 반찬들을 가지고 수연네로 갑니다. 제대로 밑반찬 같은 것을 마련할 수 없는 형편이니까 할머니가 좋아합니다.”

 

나눔의 진정한 의미

안 집사는 결코 본인이 여유롭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도 겨울이면 발가락을 잘라낸 부위가 시려 고통을 겪고 있고, 회사가 끝나면 쉬지도 못하고 설비 아르바이트를 하러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그럼에도 그가 한 소녀를 8년여에 걸쳐 지속적으로 돕고, 어린이재단에 후원을 하며, 교회 식당 봉사를 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고통에 비로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나눔’이다.

그리고 그 나눔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혈연으로 묶인 것은 아니지만, 한 인간의 따뜻한 체온을 통해 묶인 소중한 또 다른 가족들이다. 그의 가족들은 어린이재단의 후원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는 많은 어려운 이웃들과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수연이, 그리고 안 집사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수연이 할머니다. 그 소중한 가족을 위해 안 집사는 열심히 회사로, 설비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달려간다.

김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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