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장년층 세대가 그렇듯이, 필자도 어린 시절 산골애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자랐다. 우리 집은 경작할 땅이 없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결실 중 얼마를 땅 주인에게 주어야 했다. 집터도 남의 것이었다. 늘 먹고 살 것이 부족했다. 당시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몇 집 빼놓고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부업을 해야 했다. 제일 쉬운 건 남의 집 일을 거들어주고 작물을 얻어오는 방법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떌감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다. 그래야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다들 그랬듯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시내에 갖다 팔았다.  그런데 사실 그건 법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당시에는 ‘산감(山監)’이란 관직이 있었다. 말하자면 산의 나무를 보호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당시 나무를 장에 팔아 먹고 살아사는 이들에게는 아주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의 눈을 피해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판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날이 저문 저녁이나 새벽에 장작을 지게에 가득 얹어 장에 가져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팔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밤새 길바닥에서 지게 위 나무를 지키며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다.  
나무 한 지게를 팔아봐야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한 번에 두 지게의 나무를  나르기도 하셨다. 한 지게를 100미터 정도 지고 가서 내려놓으시고는, 되돌아와 남은 지게를 200미터 앞에 내려놓는 식이었다. 그런데 마을에서 시내까지는 무려 30리(12km)나 되는 먼 길이었으니...
우리가 어린 시절, 아버지는 그렇게 하셔서 우리를 먹여 살리셨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었으면 그렇게 하셨을까? 얼마 전 아버지 산소를 다녀오면서 아버지가 수백 번도 더 무거운 지게를 지고 걸으셨을 그 길을 잠시 걸어봤다. 두 개의 지게가 눈에 어렸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모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내게 아버지의 지게는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나 다름이 없다.
돌아가신 지 이미 35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만 그리워진다.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나를 키워주시고 살려주신 아버지, 어머니! 참 고맙습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