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100명의…> 펴낸 정성구 박사


장소는 도예베르트 박사의 서재였다. 사방으로 천정 꼭대기까지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박사는 사다리를 올라 책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박사와 키가 같았다. 동양 사람들로서도 크지 않은 키의 청년 정성구와 유독 키가 큰 네덜란드 출신의 박사가 같은 키였으므로 더욱 호감이 갔을 듯하다.


정성구 박사는 1972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다. 언어도 서툴렀고, 서울 도봉동의 어느 셋방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이 생각나 더욱 힘들 때였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을 때 그의 수중엔 달랑 100달러가 전부였다. 외롭고 막막하던 그때 유학생 정성구의 가슴을 뛰게 만들며 그가 공부해야 할 칼빈주의 신학에 매료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헤르만 도예베르트 박사와의 만남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를 따르는 칼빈주의 신학자인 도예베르트 박사는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로 데카르트 이후 가장 위대한 학자로도 일컬어질 만큼 거장이었다. 그러니 당시 세계의 변두리에서 온 젊은 청년학도에게는 그저 먼발치의 존재일 뿐이었다.

유학생 정성구는 그를 만나기로 작정하고 공중전화를 걸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방문을 허락해 달라는 어려운 요청에 명쾌하게 승낙하며 만날 시간과 장소를 이야기했다. 그때부터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장소는 도예베르트 박사의 서재였다. 사방으로 천정 꼭대기까지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박사는 사다리를 올라 책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박사와 키가 같았다. 동양 사람들로서도 크지 않은 키의 청년 정성구와 유독 키가 큰 네덜란드 출신의 박사가 같은 키였으므로 더욱 호감이 갔을 듯하다.

박사는 부엌일을 보는 분이 출타중이라며 직접 부엌으로 내려가서 커피를 끓어왔다. 책상과 의자, 응접세트 하나하나에서 그는 석학의 향기를 느꼈다. 거기서 한 평생을 읽고 쓰고 사색했을 것이다.
정성구는 제법 겉멋을 내며 순진한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은 칼빈주의 철학 곧 기독교 철학의 창시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칼빈주의 철학은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그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청년의 질문에 도예베르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철학은 무슨 철학?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닙니다. 법률가일 뿐이지요. 내가 아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시편 119편의 말씀 곧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내 사상을 발전시킨 것뿐입니다. 나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과학적인 사상에 관하여 말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어떤 과학이론도 제시하지 않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과학의 위험스런 영역을 밟을 때 환히 비쳐주는 ‘발의 빛’이지요. 과학은 언제나 모험과 위험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오솔길을 따라 모험을 할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동행해야 합니다. 모든 사고와 삶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 그리고 만유와 만사의 원리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그런 성경 중심의 세계관이 신학과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결국 세계관이 핵심인데 내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뒤 청년 유학생 정성구는 마치 네덜란드 신학과 칼빈주의 사상을 다 이해한 듯했다. 그리고 이 말에 감전되어 칼빈을 연구하고 아브라함 카이퍼를 연구했으며, 한국에 칼빈주의연구원과 박물관을 세웠다. 그렇게 오늘까지 한 길을 걸어왔다.

인생은 수많은 만남으로 연결되어 있다. 크고 작은 만남들이 모여 인생이란 우주를 이루는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자 정성구 박사에게도 그렇게 수많은 만남들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셈이다.

헝가리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학자 보톤드 가알, 전 미국 칼빈신학교 학장이었던 제임스 더용, 국제개혁주의신행협회 회장을 역임하한 뎅거링크 박사, 북미주의 대표적 칼빈주의 신학자 에번러너, 콜럼비아 신학교와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친 존 레이쓰 박사, 미술사를 칼빈주의적 시각에서 다시 해석한 한스 로끄마꺼, 개혁주의신행협회 창시자인 헤르만 리델보스, 프랑스 출신의 칼빈주의 신학자 삐에르 마르셀 등이 그들이다.

<내가 만났던 100명의 개혁주의 학자들>(킹덤북스)은 그렇게 정성구 박사가 개혁주의 학자 100명과의 만남을 정리한 책이다. 한 사람과의 만남 속에는 정성구 박사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들이 스며 있고, 그를 기도의 골방으로 끌어간 고민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 많은 만남들을 소중히 여겨 사진과 대화와 그들의 육필기록까지 챙겨서 보관해 온, 선비처럼 꼼꼼한 학자 정성구 박사의 성실까지 엿볼 수 있다.

문득 50여 권의 저술과 120여 편의 논문을 써낸 노학자의 뒤안길에서 우리 신학과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본 듯하다.

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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