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서 ‘화합’을 배우다 ▶ ②이승훈]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40여 년간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받았다. 나라 잃은 서러움과 경제적 수탈,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등 그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족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힌 역사는 고난, 그렇다, 분명 고난이었다. 남강 이승훈은 이러한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우뚝 솟아난 봉우리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였지만 늘 노동자 편에 선 경영자…후엔 오산학교 설립해 교육꿈 키워
출애굽기 읽으며 민족의 해방 소망…“희망은 오직 예수” 부르짖은 활화산 신앙의 소유자


가난에 찌든 서민출신인 그는 자수성가로 사업을 일으킨 뒤, 자신의 성공을 개인이나 가족의 영달에 묶어두지 않고, 민족공동체와 함께하는 삶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남강 이승훈이 찢기고 나뉜 사람들 속에서 이쪽과 저쪽으로부터 존경받는 화합의 인물로 자리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고난의 땅에 우뚝 솟아난 봉우리

태어난 지 여덟 달도 채 안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열 살 되던 해에는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돌아가신다. 다섯 살 위인 형과 함께 서당을 그만두고 먹고 사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승훈은 유기공장과 상점을 운영하는 집에서 사환으로 일하였다. 정직하고 성실하여 주인에게 인정받았고, 수금을 담당하는 중직에 오른다. 무엇보다 햇빛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새까만 옷을 입은 채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고통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인간의 평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 15세에 결혼하여 작은 집을 마련, 자립의 길로 접어든 그는 자기(磁器)를 들고 평안도와 황해도 장터를 돌아다니는 보부상이 된다.

스물네 살에는 보부상으로 모은 돈과 빌린 돈을 합쳐 남청정에서 상점과 유기공장을 차렸고, 열 살 때부터의 경험과 신용, 새로 시도하는 경영기법으로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청일전쟁을 거치며 모은 재산이 물거품이 되었으나 재기하여 서북지방의 대표적 기업가가 되었고, 조선 제일의 무역상이 되었으며,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이때도 그는 돈을 들여서 공장의 구조를 햇빛이 많이 들어오도록 고치고 먼지가 나지 않게 하여 항상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노동자들이 일할 때 입는 작업복과 일을 마친 뒤에 입는 평상복을 따로 입게 하였고, 일정하게 쉬는 시간을 주었으며, 임금을 높여 주었다. 그러자 그 지역의 다른 공장주들의 비난에도 남강은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켰다. 사업에 성공하자 그 사재(私財)로 가문의 집성촌을 만들면서, 마을의 공유 농지를 마련하여 빈부의 차를 없애고자 하였다.

사업가 개인의 힘만으로는 서구 열강의 대자본과 경쟁하기 힘든 상황임을 안 이승훈은 민족기업, 민족자본을 만들어 집합적으로 대응하는 방안을 구상한다. 1907년 여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를 만남으로 그의 운명은 사업가에서 민족운동가로 급격히 선회한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켜 이천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덕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건전한 인격이 되고, 이 같은 새 사람들이 모여 서로 믿고 돕는 성스러운 단결을 이루어 민족의 영광을 회복하는 기초를 닦자”는 도산의 이른바 ‘교육진흥론’을 듣고 얼마나 감동하였던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는다. 곧장 그는 고향에 세운 서당을 강명의숙(講明義塾)으로 개편하고 오산학교(五山學校)의 문을 연다. 문을 열고도 학교가 힘들어 교사들이 굶는다고 하자 “나 혼자만 밥 먹을 수는 없다. 남은 집과 세간을 팔아 학교에 주고 우리는 학교 곁에 가 학생들 밥이라도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학교의 지붕에 비가 샌다고 하자 자기 집 기와를 벗겨서 이었다.

그에게 “민족운동은 단순히 민족의 광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본래의 기상을 회복하여 한사람의 굶주리고 눌리는 자도 없이 덕스럽고 부강한 조국을 이루는 일”이었다. 과거 봉건사회에서 그랬듯이 양반, 상민, 천민의 구분도 없고 직업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가난한 서민출신 이승훈의 소박한, 그러나 당연한 민족운동관이었다.

민족사랑과 예수사랑이 하나 되어

이승훈은 40대 후반에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 47세가 되던 1910년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를 가진다. 그의 평전을 쓴 김기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서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과 모세에게 이끌려 거기서 나왔다는 것과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갈릴리 해변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쳐 주었다는 것과 나중에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과 같은 성경의 이야기가 그에게 와 닿았다고 쓴 바 있다. 이승훈의 신앙생활을 활화산과 같았다. 개종 후 곧바로 오산학교에다 교회를 짓고 학생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나라 잃은 이들에게 ‘소망’은 ‘오직 주 예수 뿐’이고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없다”는 찬송을 소리 높여 불렀다. 일제 식민통치세력에 저항하듯이 말이다.

결국 이승훈은 1930년 67세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가난하고 불운했던 성장 과정을 딛고 사업가로 성공한 뒤에도, 자신의 사업가적 소질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과 하나님 신앙에 바친 그의 불꽃같은 삶이 오늘날 더욱 값지게 다가온다.

■남강南岡 이승훈 李昇薰(1864-1930) 연보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이석주와 홍주 김씨의 차남으로 출생. 10월 어머니 홍주 김씨 별세
1873년 아버지와 할머니 별세
1874년 청정 임일권의 유기점에 사환으로 취직
1887년 청정에 유기공장과 유기상점 설립
1901년 운수업·무역업에 진출
1907년 3월 안창호 만나 민족운동 투신 결정. 7월 신민회 입회, 평안북도 지회의 책임자로 활동, 강명의숙을 설립. 12월 오산학교 설립, 교감에 취임
1908년 기독교에 입교, 평양에 태극서관 설립
1909년 평양에 자기회사 설립. 1월 31일 정주역에서 순종을 알현, 순종이 격려금 하사
1909년 오산교회 설립
1910년 7월 11일 오산학교 1회 졸업식 거행
1916년 오산교회 장로로 장립
191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입학
1919년 2월 10일 독립선언 협의와 3월 1일 독립선언 뒤 일경에서 체포 수감
1922년 7월 21일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으로 경성감옥 출옥
1924년 5월 동아일보사 사장 취임
1924년 10월 동아일보사 고문 취임
1925년 8월 오산학교 재단법인 이사장 취임
1929년 기독신우희 입회, ‘성서조선그룹’과 합류
1930년 5월 3일 오산교정에서 이승훈의 동상제막실 거행.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별세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추서


박정신
숭실대 기독교대학원장이며 기독교역사학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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