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이력으로 되돌아본 내 인생여정엔 행운이란 없었는데…

위층에서 아이들이 뛴다. 동선이 명확히 파악될 만큼 요란하다. 옆집에선 개가 짖는다. ‘아침 형 강아지’라 주로 심야나 새벽에 40분 정도 짖는데, 오늘은 좀 늦었다. 어젯밤에는 402호에서 우리 집으로 통하는 복도에다 고추를 널어놓는 바람에 불쑥 나온 배로 벽을 쓸어가며 집에 들어왔다. 벌써 사흘째다. 불행에 대한 내성이 워낙 약해서 벌써 우울해지려고 한다(그래, 나 쪼잔하다). 약발이 벌써 떨어져가나? 충전기 스위치를 넣듯, 다시 한번 이사의 역사를 더듬어야겠군.

#파란 많은 나의 ‘이사이력서’

대학교 2학년까지 내 방이 없었다. 대소변 수발을 해야 하는 할아버지와 다른 네 식구가 4제곱미터쯤 되는 단칸방에 살았다. 병실이 침실이고, 식당이 거실이었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영역이 좁으면 다툼이 심해지는 법,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야 했다. 궁리 끝에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고도의 축성술을 발휘해서 짐들을 벽에 붙여 쌓고 겨우 한 몸 뉠 공간을 마련했다. 몸을 험하게 굴릴 때마다 꼭대기에서 올려놓았던 짐이 굴러 떨어지며 정직한 응징을 가해왔다. 냉난방시설이 없는 탓에 겨울이면 자리끼가 얼어터질 정도로 춥고, 여름이면 찜통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서글펐느냐고? 천만의 말씀. 오히려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집안 식구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분리된 공간을 가졌잖은가?
다락방이 비좁다는 느낌이 들 때쯤 독립을 했다. 스물서너 해를 외갓집에 군식구로 얹혀살다가 마침내 엑서더스를 감행한 것이다. 적은 보증금으로 갈 수 있는 데라곤 외곽도시의 변두리,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뿐이었다. 달동네는 무슨, 처음에는 그냥 달인 줄 알았다. 사다리만 놓으면 곧장 토끼를 만나러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 한 칸에 부엌과 화장실은 세입자 네 가구 공동사용이었다. 불행했느냐고? 무슨 말씀을. 여기는 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없지 않은가? 옆으로 두 번 구르며 잘 수 있지 않은가?
언덕을 오르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다. 달은 제 자리를 찾아서 돌아갔지만 이번엔 집이 길을 잃었는지 논 한복판에 들어앉았다. 방위로 말하자면 좌 야산, 우 전답, 북 목장, 남 비닐하우스의 ‘길지’였다. 어느 집에선가 쓰레기 배출구로 연탄재를 떨어트리면 먼지가 토네이도처럼 솟구쳐 올라와 모든 가구로 펴져나갔다. 인근 목장에서는 사시장철 소똥 냄새를 풍겼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다녔는데, 그나마도 저녁 9시면 끊겼다. 서울에서 퇴근하면 빨라야 밤 열한 시. 한겨울 논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십리 길은 춥고 무서웠다. 고달팠느냐고? 어림 서푼어치도 없는 말씀. 벽돌만한 워크맨에 리시버를 꽂고 듣는 나나무스꾸리의 음성만으로도 한밤중 산책은 말할 수 없이 황홀했다.
등본 앞뒤를 꽉 채울 만큼 자주 이사하며 온갖 주거형태를 다 경험한 끝에 이제 특별시와 경기도 경계선에 25평 저택을 마련했다. 방이 자그마치 셋이다. 우리 집을 바라보며 나도 웃고 남들도 웃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내 인생에 네잎클로버는 없었다

행운에 주린 나는 풀밭만 보면 네잎클로버를 찾는다. 남들은 한 자리에서 몇 장씩 찾기도 한다는데, 난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불행의 화신이 될 생각은 없다. 행운이 날 외면하면 내가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마침 식물원에서 맞춤한 대체물을 찾았다. 이파리 네 장, 조그만 몸피, 연한 녹색까지 생김새는 영락없지만 클로버가 아니라 ‘네가래’라는 녀석이다. 한방에서는 눈의 충혈을 풀고 신장과 간의 질환을 치료하며 피를 멈추게 하는 약재로 사용한단다. 이만하면 새로운 ‘행운의 상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력이다. 영문이름이 ‘유러피언 워터 클로버’(European Water Clover)라니 아주 헛짚은 건 아닌지 모른다. 양지바른 풀밭이 아니라 축축한 늪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고단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이 진짜배기니까.
눈을 감고 햇살이 쏟아지는 가을날 식물원의 오후 세시를 떠올린다. 잔디광장을 지나 습지식물원으로 들어가면 부들 밑으로 네가래의 행운 퍼레이드가 한창이다. 환상적이다. 행복하다.
언제부터였지? 위층이 조용해졌다.

최종훈
후니, 최종훈은 편집기획자로 활동한다. <목회와신학>을 거쳐 <일하는 제자들> <좋은 교사> <굿모닝 지저스> 등 창간작업에 참여하였다. 멕스루케이도의 <일상의 치유> 필립얀시의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일>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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