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감동산책 - ‘감동’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

녹이 낀 구리거울
너희들이나 나나 이만큼의 세월이 흘러 시인 윤동주를 그냥 동주 형이라 불러도 어색할 것 없는 나이, 젊은 시절에 거듭 밑줄을 그었을 ‘참회록’(懺悔錄)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있니?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닦아보면 어떤 모습이 다가올지 모르겠다.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우리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구나 싶은 것은, 그런 슬픔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른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야. 녹이 낀 구리거울에 대한 안쓰러움이나 민망함도 없고, 그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는 송구함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 말이지.

나침반과 링반데룽
길을 잃었을 때 꺼내드는 나침반의 생명은 ‘떨림’에 있다고 해. 파르르한 떨림 끝에 멈춰서기에 바늘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신뢰하는 것이지. 떨림이 방향을 신뢰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여겨지지 않니?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은 떨림이 없는 상태, 잘못된 자기 확신에 빠져 떨림을 잃어버린 우리는 고장 난 나침반이 아닐까 몰라. 오래 전 멈춰버린 방향을 신조처럼 여기며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마음으론 가까워도 얼굴 본 지가 꽤 되었구나. 분주함과 성실함을 혼동할 만큼 우리는 분주함에 익숙해져 버렸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이따금 말에서 내려 달려온 쪽을 바라본다지. 너무 빨리 달려 자신의 영혼이 못 쫓아왔을까봐 기다리는 것이라고 해.
동주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우리들의 모습 중에는 링반데룽에 빠진 모습이 있어. 독일어로 ‘링반데룽’(Ringwanderung)은 조난과 관련된 용어로, ‘둥근 원’(Ring)과 ‘걷다’(Wanderung)가 합해진 말이야. 등산 도중 짙은 안개 또는 폭우나 폭설 등 악천후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채 계속해서 같은 지점을 맴도는 현상을 말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같은 지역을 맴도는 것이지. 그러다 보면 체력은 바닥나고,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이 밀려오고,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되고. 링반데룽에서 빠져나오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는데, 자신이 링반데룽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해. 그 당연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확신 아닐까 싶단다. 오늘 우리는 집단 링반데룽에 빠진 것이 아닌가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이 헤매는 것을 보고 안도하기도 하고.

에스겔이 본 환상은 환영처럼 다가오곤 해. 골짜기 가득 널려 있던 마른 뼈, 그들은 눈부셨을지 몰라도 죽은 존재였어. 말랐다는 것은 말랐다는 것, 아무리 골짜기를 가득 채웠어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었지. 규모와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 중 빠뜨릴 수 없는 모습이지 싶단다.
이따금씩 ‘어느 날의 기도’를 적곤 해. 기도를 드리면서도 단어와 표현이 너무도 익숙하여 마음을 담지 못할 때가 있지. <니체의 문체>를 쓴 하인츠 슐라퍼는 문체와 관련, 이런 말을 하더구나. “저자의 문체는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통해서 그런 것처럼, 그가 피하는 단어들을 통해서도 형태를 갖춘다.” 애써 ‘어느 날의 기도’를 적는 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안간힘이지.
어느 날 적은 기도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어.

“너무 오랫동안 당신의 쟁기 날이 닿지 않은, 오늘 우리는 황무지입니다.”
고3 시절 국어시험 문제 중에 ‘황무지’를 한문으로 쓰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쓰지를 못했어. ‘荒蕪地’라 써야 하는데, 어렴풋 떠오를 뿐 자신이 없었지. 거칠다는 뜻의 ‘荒蕪’에는 풀도 물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나는 글자보다도 글자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에 우리들을 비춰보면 주님의 쟁기 날이 닿은 지 까마득한, 헝클어지고 굳은 채로 방치되어 있는 황무지가 떠올라.

걸음을 움직이게 한 것
자격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를 목회의 자리에 세웠고 여전히 이 길을 걷게 하는 말씀이 있어. 과연 말씀을 따라 사는지의 여부를 떠나 여전히 팽이의 중심축처럼 자리를 잡은 말씀이지.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한센병 환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야. 당시의 한센병은 천형(天刑)으로 여겨졌어. 몸이 문드러지는 것보다는 모두에게서 떨어져야 하는, 격리와 소외가 더 큰 아픔이었지. 한 한센병환자가 찾아와 꿇어 엎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를 고쳐 마을로 돌려보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한적한 곳이었음에도 말이야. 교회의 존재 이유와 방식을 그 말씀에서 찾는 것은 얼마나 많은 현실을 역류해야 가능한 일일까.
사람들의 걸음을 이끈 것은 따로 있었다 싶어. 단지 한센병을 고쳤다는 단순한 사실 말고 말이지.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는 장면이 있는데, 예수님이 한센병환자를 어루만져 주시는 모습이야.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도 살리신 분인데도 말이지. ‘깨끗해져라’는 말보다도 어루만져 주심이 먼저였어. 그야말로 얼을 끌어안는 예수님의 ‘얼싸안기’였지. 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되새김질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걸 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싶은데, 알리지 말라 하는 대목이야. 병을 고친 예수님은 자신의 명함이나 핸드폰 번호를 전하지 않았어.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엄히 경고하셨지. 우리 삶에는 아무리 말하지 말라 해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 법, 구덩이를 파고서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쳐야 하니까. 장독 덮은 자랑에 발뒤꿈치를 드는 세상을 두고서 예수님은 세상이 놀랄 만한 일을 하고서 아무도 모르게 덮고 있었던 거야. ‘막현호은 막현호미(莫見乎隱 莫顯乎微)’라는 구절 생각나니? ‘감추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내는 수 없고 숨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수 없다’는, 예수님이야말로 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지. 그분이 누굴까,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움직인 이들이 걸음을 옮겼던 것이지.

감동과 감전
어떤 단어의 뜻을 좀 더 알고 싶을 땐 사전을 뒤적이곤 해. ‘감동’(感動)은 ‘느낄 感’에 ‘움직일 動’을 쓰고 있더군. ‘느낄 感’자는 ‘다할 함(咸)’에 ‘마음 심(心)’, 그런 점에서 ‘감동’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마음의 움직임’에 있구나 싶었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순간,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 은총이란 ‘줄탁동시’(啄同時)를 경험하는 것인지도 몰라. 바로 그 순간 예수님도 당신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아셨으니까. 내게서 빠져나간 것을 내가 아는 것, 내게서 빠져나간 것으로 내가 흔들리는 것,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겠지.
감동(感動)은 감전(感電)일지도 몰라. 내가 먼저 흔들려 누군가를 흔드는 것, 내가 먼저 놀라 누군가를 놀라게 하는 것 말이야. 황무지가 되어버린 세상, 그럴수록 우리가 먼저 흔들리면 좋겠어. 감전이 된 것처럼 진정한 사랑 앞에 우리가 먼저 움찔 반응했으면 말이야. 아무리 작더라도 그런 몸짓이 모여 세상의 구원을 꿈꾸게 하는 강물은 흘러갈 테니까. 언제고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한희철
강원도의 작은 마을 단강에서 15년간 목회했다. <크리스챤 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동화작가로 등단했고, 단강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보에 실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에서 이민 목회를 했으며, 현재는 정릉감리교회를 섬기며 여전히 따뜻한 품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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