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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노래 차가운 기억, 불러라 그 노래!
[256호] 2021년 07월 01일 (목) 이호선 @

무슨 노래인지 몰라
구순이 넘은 시아버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배에 있는 힘을 다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시작하는 앞머리마다 힘을 주어 외치듯 1절을 연거푸 불렀다. 며느리인 나는 그 옆에서 오른팔을 왼쪽 가슴에 대기도 하고 응원을 하듯 오른손을 연신 흔들기도 했다. 세 번째로 애국가가 열창될 때에는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 네 번째쯤 1절이 반복되는 시점에 시아버지는 노래를 멈추고 다리가 아프다며 소파에 앉았다.
“아버님, 지금 부른 노래가 뭔가요?”
“몰라…. 그냥 불렀어. 이게 뭔 노랜가 나는 몰라!”
치매를 앓고 있는 시아버지는 목청 높여 반복해서 불렀던 그 노래가 무엇인지 몰랐다. 뜨겁게 불렀던 노래의 기억은 그렇게 차가웠다.

잊히지 않는 것들
많은 것들이 잊힌다는 질병 앞에서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시아버지는 그렇게 애국가를 동네가 떠나가라 부르면서도, 아직도 전쟁 중이라고 믿고 있으며, 50이 넘어 머리가 희게 세가는 아들에게 공부를 다 마쳤는지를 물어본다. 평생을 반공을 외쳤던 분이 포로수용소 시절 반공 문신을 새겼던 그 팔뚝을 보고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반공의 노래를 전심으로 부르는 의연한 눈빛을 본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는 것일까. 자신마저 잊는다는 무념의 병 앞에서도 기억되는 것은 무엇일까.
손주를 그리 사랑해도, 손주의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 못하는 이들이라도, 오랜 기억 속 노랫가락은 읊어댄다. 성격이 변하여 괴팍하기 이를 데 없어지는 순간에도 좋아하던 옛 음조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어깨를 덩실거리기도 한다. 눈을 감은 듯 현실에는 그리도 차가울지언정, 눈뜨고 바라보듯 과거에 대해서는 나도 모를 움직임을 나타낸다. 실제 치매와 노래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알츠하이머 치매환자를 대상으로 본인이 선곡한 노래 와 치료사가 선곡한 노래 가운데, 치료사가 제시한 노래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노래에 대한 친숙도와 선호도가 높았고 구체적으로 기억을 회상할 수 있었으며, 회상하는 데 걸린 시간도 짧았다. 더불어 실험 전후의 기분 변화 폭이 더 컸다. 흥미롭지 않은가?

노래를 불러보자
그러니 나이 들어 나를 잊을 때를 대비하여 우리는 노래를 불러야 할까보다. 노래방 애창곡이건, 그 옛날 노모의 등에서 들었던 자장가건, 싫었지만 지독하게 불러야 했던 교가들도 어찌 되었건 부르기만 했다면 기억을 잊는 질병 속에서도 되살아나니 말이다. 들은 노래가 아니라 불렀던 노래가, 어려운 노래보다는 쉬운 노래가, 슬픈 노래보다는 기쁘고 희망찬 노래가 더 잘 나타난다니, 우리도 그런 노래를 불러보자. 가장 뜨겁게 불렀던 노래들, 가장 자주 불렀던 노래들, 가장 의미를 둘 만한 노래를 연신 흥얼거리고 소리 내어 불러보자. 기억을 담당한다는 해마에 세월의 조각도로 파내듯, 긁어내듯 심어두자. 소홀했던 행복의 축적물들이 쥐어짜듯 부르는 늙은 성대를 통과해 치매의 그늘에 빛을 내리쬔다.
아버지가 불렀던 추억의 찬가들은 아버지의 전성기를 농축해 아들의 뇌리에 새겨지고, 나이 들어가는 아들은 아버지의 노래에서 그의 전성기를 듣는다. 어머니가 흥얼대던 사랑의 노래들이 어머니의 삶을 담아 딸의 심정에 새겨지고, 이내 딸은 성숙의 지점에 이르러 어머니의 지난 세월을 무의식으로 부르게 된다. 염색을 시작한 딸이 어머니의 노래에서 그의 사랑의 시대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세대의 전성기에 불렀던 노래들이 잡음 가득한 오랜 레코드판처럼 무의미 속에서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의미의 노래로 흘러나온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건강할 때, 가사를 읊고 노래할 수 있을 때, 우리의 기억이 자녀의 뇌리와 심정에 남을 수 있을 때, 생의 기쁨과 찬란함을 부를 수 있을 때, 노래해야 한다.

뽕짝이면 어떠랴, 찬송가면, 가곡이면 어떠랴. 기억이 성대를 통과하여 나의 습관에 박힐 그 노래, 자녀들의 고막을 통과하여 해마에 글로 새겨질 노래, 세대를 통과하여 손주들에게 기억될 그 노래를 부르자. 매일 부르고 자주 부르자. ‘그 노래’ 하면 내 아버지가 생각나게, ‘그 박자’ 하면 내 어머니가 생각나게 부르자.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잊게 될지도 모를 그날에 내가 부를 ‘내가 부르고 있지만 나도 모르는 그 노래’로 내가 나를 기억하게 하자. 자식이 나를 기억하게 하자. 그리고 손주들이 나를 기억하게 하자. 기억은 세대를 통과하며 역사가 될 것이다. 잊혀져가는 역사 속에 핏줄 콘텐츠가 될 그 노래를 시작해보자.
시아버지가 불렀던 애국가를, 내 어머니가 불렀던 찬송가를 기억한다. 그래서 나도 노래한다. 음치 박치인 내가 보란 듯이 부른다. 나를 잊을 시절에 나를 기억할 그 노래를 오늘 부른다. 목청 터져라 부른다.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이자 한국노인상담센터장. 상담전문가이자 부모교육전문가로 활동중이며 나이들어가며 필요한 것들과 어른의 역할에 대한 글을 주로 쓴다. <나이들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법> <가족습관> 등을 썼으며 <이호선의 나이들수록>을 글로 쓰고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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