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동 마이클 잭슨’ 이철희 자원봉사자

“삐익~ 삑~ 안녕하세요! 학생~ 너는 우리나라의 희망이란다. 늘 건강해야 돼~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매일 같이 거듭되는 광경. 길을 오가는 행인들도,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운전사도 익숙하고 자연스런 아침이다. 심지어 다정한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20m 남짓의 공항대로 건널목은 5분마다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광장이 된다. 무려 40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이어온 열혈 봉사자가 낳은 결과다. 빨간 셔츠를 입고 춤을 추듯, 도로 위를 주름잡는 이철희 자원봉사자(75세)는 어린 학생과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작은 거인이다. 무엇이 그를 극강의 봉사자로 만든 걸까. 무엇을 위해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걸까?

작은 거인
‘빨간 옷의 작은 거인’, ‘방화동의 마이클 잭슨’이란 별칭답게 이철희 봉사자의 몸동작은 절도 있고 화려했다. 환상의 춤사위를 벌이던 마이클 잭슨을 연상케 하는 그는 150cm의 단신이지만 문워킹 같은 유려한 스텝과 절도 있는 손동작으로 복잡한 도로 위에서도 그를 돋보이게 한다. 그의 몸놀림을 넋 놓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는 서울 강서구 일대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포털사이트에는 그를 소개한 콘텐츠들이 무수히 뜬다. 웬만한 공중파, 종편 TV는 물론, 지역방송과 유튜브까지 수십여 차례 출연했다. 교통안전 활동뿐 아니라 새벽 환경 보호를 포함해 하루 종일 조끼를 갈아 입어가며 다양한 봉사활동을 전개한다.
“명절 연휴 때 어쩔 수 없이 봉사활동을 쉬는 때가 있었어요. 그때마다 어찌나 몸이 아프던지. 잠시라도 멈추면 안 되는 몸이 되어 버렸더라고요. 하하하.”
그의 봉사 인생, 특히 교통안전 봉사활동은 청소년 시절 누님의 뺑소니사고가 결정적이었다. 함께 피난을 내려온 유일한 형제였기에 그의 가슴은 갈래갈래 찢겼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가 조금만 위험해 보이면 저도 모르게 바로 도로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운전자들한테 멱살도 잡히고 파출소에도 숱하게 끌려갔죠.”
안타까운 경험이 그의 봉사 인생을 촉발시켰지만, 사실 그의 심연에는 극한 고독과 이타적인 마음의 뿌리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타인을 향하여
네 살 되던 무렵, 한국 전쟁으로 아버지와 형, 누이를 잃고 피난을 나왔다.
어머니의 구걸로 연명하며 누이와 함께 두려움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나중에 서울 문중의 극적인 도움으로 집도 얻고 학교에도 다닐 수 있게 됐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괄시와 폭력, 철저한 무시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할아버지께서 주신 한 권의 책이 그의 삶에 나침반이 되었다.
“그 책에 작고 왜소한 사람은 남들과 달라야 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무엇이든 제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표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향해야 한다는 놀라운 내용이었어요. 힘들게 세상살이할 때, 왜소한 사람의 생이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소년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어디서든 최선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행동했다. 운동도, 일도, 인사도, 춤도…. 그러다 본인보다 더 이타적인 배우자를 만나면서 그의 생은 또 한 번 달라졌다. 신혼 때부터 마을의 온갖 궂은일은 두 사람이 도맡아 했다. 홍수로 학생들이 떠내려갈 때도, 마을 치안이 위태로워 주민들이 불안에 떨 때도.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봉사활동만 하세요. 생계는 제가 책임질 테니….”
강단 있는 아내의 결단이 있던 1981년. 그는 양로원 돕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봉사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마을 통장과 교통 안내 봉사는 물론, 무엇이든 타인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 20년까지는 서러운 일도 많이 당했어요. ‘당신이 뭔데?’ ‘봉사 누가 하랬어?’ ‘그딴 거 필요 없어.’ 이런 비난과 훼방이 많았죠. 하지만 이제는 모두 내 편이 되었습니다. 하하~”
그는 40년 동안 깔끔이 봉사단, 110명 봉사단, 푸른신호등(교통봉사대) 등의 지역 봉사 외에도 범죄예방 위원(검찰청), 법사랑 위원(법무부), 안전보안관(행안부) 등 관에서 위임하는 공적 봉사활동에도 앞장서 왔다. 또한 그는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빠트리지 않았다. 오늘 나의 봉사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전달됐는지, 내일은 또 어떻게 봉사에 변화를 줄지, 제스처와 인사 멘트도 계속 바꿔 보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봉사는 제 삶 자체이죠
“어느 날 턱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아이와 길을 건너면서 제게 인사를 하더라고요. ‘아저씨 저 기억나세요? 제가 초등학교 때 교통 봉사해 주셨잖아요. 그때 해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살았어요. 주위에 장애인이나 노약자 있으면 도와주세요라고 하신 말씀이요’ 그 말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공항감리교회의 권사이기도 한 이철희 봉사자는 봉사의 삶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이자 은혜라고 고백했다. 그의 봉사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임은 물론이고 그 결과를 삶 속에서 톡톡히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례를 경험하고 육두문자를 듣더라도 먼저 섬기고 먼저 양보하면, 반드시 그들 역시 양보와 배려가 배인 이웃으로 변화되어 있더라고.
“누구나 내 자녀, 내 가정의 안녕과 평안을 우선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웃의 평안과 행복이 더해져야 비로소 나와 나의 가정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내 옆집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부터라고 했다.
“봉사는 제 삶 자체죠. 행복! 난 봉사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계속, 쭈욱~ 지금처럼 살아갈 겁니다.”

글·사진=김희돈 기자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