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쉴 수 없었던 휴가
상담 첫 날, 지영 씨는 지난 휴가에 도무지 쉴 수 없었던 경험부터 토로했습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40대의 그녀는 자신이 일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상담실을 찾았지요. 그런데 일 덕분에 성취감을 누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잃을 정도로 일에 매몰된 워커홀릭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동안은 아무렇지 않다가도, 아무 일 없는 휴일이나, 몰아치던 프로젝트를 하나 마무리 짓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고, 울적한 생각이 슬며시 파고들며, 일을 놓으면 자신이 하잘것없어지리라는 생각에 눈물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20년 가까이 쉼 없이 일하느라 누적된 피로가 터진 것인지, 그저 일만 하는 자신이 익숙해져버린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먹고 쉬어보자고 떠난 휴가였지요. 그래서 아무 일정도 짜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여유를 누려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일할 때처럼 마음은 조여 있고, 할 일들을 놓치고 있는 듯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내내 그녀를 괴롭혔지요. 초록의 풍경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음에도, 웃음 한 번 지어지지 않는 자신을 보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씁쓸해했습니다.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살면서 지영 씨 마음이 편안한 만족감으로 가득했던 적이 기억나세요?”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번에 저희 팀 상 받았을 때, 아니 지난번 승진했을 때? 대학시절 유럽 배낭여행 갔을 때?” 여러 순간을 떠올리다가, 남들 눈에는 빛나 보이고, 부러움을 산 순간들이었지만, 자신만의 충만감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참 생각에 잠긴 그녀는 40대가 되기까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맞추어가는 사이, 자신만의 충만감을 누리던 방식마저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실존주의 상담(Existential counseling)에서는 인간이 본래적인 존재양식을 상실하고 평균화되어가면서, 책임지지 않는 몰개성적 인간으로 전락하면 불안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꿈과 욕망이 외부의 세계와 타인의 시선에 결부되어 있는 한, 진정한 충족감이란 얻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때문에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본래의 자기를 되찾아, 언제나 자기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더불어 자기로서 존재함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져야만 자유도 온전히 누릴 수 있겠지요.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가 가능성의 존재일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존재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온전히 떠맡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최대한 창조해냄으로써 위대함도 탄생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나를 찾아서 일으켜 세워야
여백 가득한 여행에서도 불안함과 초조함에 시달리던 그녀는 마지막 상담 회기에서 조금은 편안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도 ‘지금, 여기’ 서 있는 내가 느껴지지 않았던 건, 쉼을 얻기 위해 떠난 여행에 정작 자기 자신은 두고 갔기 때문이라고 말이지요. 누군가의 좋은 평가를 위해 달리면 자유를 잃는 대신, 책임에서도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는 달콤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온전한 책임 없이는 온전한 나 자신도 누릴 수 없겠지요. 내가 나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지금, 여기 서있는 내 생생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꿈을 채우기 위해 달리느라 지쳐있는 나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찾아 그 책임을 온전히 질 때, 나만의 꿈도 자유의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서현
전 KBS아나운서.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의 힘>, <뜨거운 위로 한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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