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서공회가 펴낸 <대한성서공회사>에는 성경이 이 땅에 전해진 경위, 즉 번역과 전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을 따라 가보면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19세기 말 조선
백사겸(白士兼)은 1860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아홉 살 무렵 병을 얻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그는 먹고 살 방도가 없었다. 형과 단 둘이 남아 구걸하며 살다가 직업을 갖게 되었는데 바로 ‘복술업’이었다.
당시 시각장애인들의 7~8할은 이 일에 종사했다. 앞을 보지 못하면, 신비한 영적 세계를 본다는 미신이 팽배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사회는 여러 열강들의 침입과 탐관오리들로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기에,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람들을 많이 찾았던 시대다.

한 복술가의 회심
백사겸은 그 시기에 복술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특히 눈치가 빠르고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했던 재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백 장님’으로 불리며 고양읍에서 유명세를 탔다.
그러다가 그는 운명적인 한 사람을 만난다. 당시 남감리회 선교사들은 그 지역 선교를 위해 매서인을 파송했는데, 백사겸은 그 매서인을 만나고, 그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매서 김주현이다. 백사겸은 김주현의 손에 이끌려 선교사 리드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 최초의 세례인들로부터 현재의 ‘고양읍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복술가였던 백사겸의 회심은 마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삭개오’를 떠오르게 한다. 재물이 넉넉했던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빌려준 ‘사채’를,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탕감해 주는 한편, 점을 쳐주고 번 전 재산을 팔아 어떻게 처분할까를 놓고 기도하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백사겸을 향해 어리석다며 손가락질 했고, ‘천주학에 귀신들렸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강도들이 백사겸이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한 3천 냥을 강탈해간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 일에 감사한다. 이제 재물이 아닌 하늘 뜻을 향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 전도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리드 선교사와 함께 13년간 개성, 파주, 철원, 고양 등지에 성경 보급소를 세우고 전도했다.

조선의 삭개오, 전직을 활용하다
리드 선교사는 한 보고서에서 백사겸이 맡은 성경보급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록했다.

“그곳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드리는 동시에 전도가 이루어졌다. 700여 권의 단편 성경이 판매되기도 했다. 이전에 복술가였던 소경이 이 보급소를 맡았는데, 내가 그 곳에 내려갈 때마다 이 전직 점술가의 열정적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로 보급소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복술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그의 영향력은 회심 이후에도 이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점을 보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가 회심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보기가 최선지라는 사람인데, 그는 자신의 문제를 상담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점괘를 받기 위해 백사겸을 찾아왔다가, 점괘 대신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과거에 비록 옳지 않은 일을 했더라도, 그것을 교리적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보다, 그 일을 통해 어떤 하늘 섭리가 있을지를 생각해보며 백사겸의 삶을 읽는다. 특히 어려운 시기에 힘든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고, 전 재산을 팔아 나누려 했던 그의 삶, 평생을 복음 전도자로서 이타적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그의 삶은 회심의 전형을 보여주며, 잔잔하면서도 큰 감동을 남긴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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