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마르틴 부버와 더불어

코로나19, 1년을 넘겼고, 다시 반년을 채워가고 있네요. 누가 훔쳐갔지 싶은 기간이기도 하고, 대구의 신천지 사태를 비롯해서 하나하나 따져 생각하면 숨이 막히도록 길게 여겨지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간 에볼라, 사스, 메르스 등 바이러스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니 처음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중 하나려니 하며 편하게 생각했지요. ‘너무 법석을 떠는 거 아냐?’ 그런데요, 우리는 그간 우리가 일상으로 여겼던 당연한 것들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사람 간의 가로막이 판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심지어는 드라마에서조차 마스크를 쓰는 쪽으로 흐르고 있어요.

2021년을 맞으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마스크, 이제 아예 마스크의 시대가 오는 게 아닐까? 이게 일상이라 여겨지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오로, 삶의 형태와 몸짓을 고쳐가며 살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알고 보면, 애초에 벌거벗고 살던 인간이 옷을 입게 되었을 그때에도 불편했겠지, 그런데 그 옷이 멋이 된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마스크 또한 우리의 얼굴이 되고, 멋의 자리를 잡게 될지 누가 알겠어.


나는, 너는 누구인가
그런데 과학자들은 더욱 심각한 내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최근 WHO사무총장은 코로나19보다 더욱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나타날 것이라며, 또 다른 ‘팬데믹’에 대처하는 조약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지구온난화와 연계된 두려운 보고서들은 자주 만났지요. 그렇잖아도 얼굴이 없는, ‘나_자아’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싶은 세상 가운데 나의 주체성을 가지고 ‘나’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거듭 다그쳐야 되겠습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화이야깁니다. 비행기가 추락 위기를 맞습니다. 승객 중 유명 여배우, 그녀는 갑자기 손거울을 꺼내들고 자기 얼굴의 화장을 지우기 시작하지요. 이내 드러나는 낯선 얼굴, 평소 여기저기 소개되던 지면의 얼굴과는 다르게 생소한 거울 속의 얼굴을 향해 질문합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너는 누구냐?”
많은 현대인은 자기 아닌 삶을 살고 있으면서 그 삶이 자기의 삶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고, 자신을 아는 자는 명철한 자”(知人者智 自知者明)라고 했어요. <나와 너>의 저자 마르틴 부버는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즉, ‘나’의 존재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함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은 ‘너’의 앞을 가로막고서서 아예 혼자 사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공부도 사업도 혼자서 합니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체온_인격이 통하기 힘든 라인(line, 線)뿐이어서 ‘너’는 이미 ‘그것’아니면 ‘적’으로 인식될 처지입니다.

너와 그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네에도 선민의식에 버금가는 일등지향귀족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서러움을 하도 당하다보니 생긴 일등-성공지향의식이 사회의 병폐로 드러난 현상이지요. 부버가 지향한 ‘나와 나’의 사회가 아니라 부버가 지적한 ‘너와 그것’의 꼴로 흘렀습니다. 산업재해사망률이 OECD국가 중 1위라니. 그 이유도 ‘나’로 일컬어지는 ‘일등_성공 층’이 ‘그것’의 자리에 있는 ‘보통사람_비(非)성공 층’를 경시하는 근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일등귀족들에게 소중한 것은 기득권 고수입니다. 심지어 교회들마저도 근본으로 삼고 지켜야 할 귀한 가치들을 ‘성장’이란 블랙홀에 매몰시켜버렸고, 그 ‘성장’이란 괴물을 여전히 숭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많이 가지고, 크게 되면 성공인가요? 사람이 사람됨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버는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을 사는 자를 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며 ‘그것’이 ‘너’가 되는 변환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종말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민족의 갈등과 전쟁, 기근과 지진, 신앙인의 수난과 거짓 선지자를 말씀하시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태복음 24장 12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맨 끝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문제를 두셨습니다.
비록 얼굴이 가려져도 사람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보아라. 참 좋구나!”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입니다.

임종수
한국교회의 전통을 문화적으로 새롭게 세워가는 데에 평생을 수고해왔다. 자연 친화적인 목회와 삶에도 탁월함을 보인다. 아름다운동행 초대 이사장이고 큰나무교회 원로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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