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다시 만난 ‘LP판’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흐름인 복고주의, 레트로는 둔한 사람들의 감성에도 묘한 감흥을 준다. 이 가운데 최근 불고 있는 레코드판(LP)의 귀환이 참 반갑다.

레트로, 레코드판
세련된 현대식 수로 옆, 황학동 벼룩시장이 아침을 열고 있었다. 골목 끝 도깨비시장과 함께 과거를 여실히 보여주는 벼룩시장의 구닥다리 점포들에는 놋그릇, 작두, 재봉틀 같은 옛 물건부터 카메라, 세탁기, 노트북, 스마트폰까지 없는 게 없다.
벼룩시장에서 가장 레트로한 점포는 레코드판 가게였다. 마치 드라마 촬영을 위해 재현해 놓은 세트장 같다. 1975년부터 레코드 가게를 운영해 온 황학동 터줏대감이 막 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아침에 물건이 나오는 바람에 부랴부랴 사 오는 길이예요. 레코드판은 대부분 흔치 않은 물건이라 나오면 먼저 잡는 게 임자거든….”
<돌레코드> 김 사장님의 얼굴 위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아침 일찍 서두르길 잘했다는 표정. 무려 20여만 장의 음반들이 빼곡한 그의 가게는 사방팔방 모든 곳에 LP판과 낡은 용품들로 가득하다.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방대한 레코드판과 CD. 심지어 일제 강점기에 나온 앨범도 있고, TV가 없던 시절에 극장식 코미디 실황을 녹음한 희귀 음반들도 있다. <돌레코드>의 모든 공간은 달력만 2021년을 가리킬 뿐, 50년 전 어느 봄날의 아침에 멈춰 있었다.
“판 하나 들어볼까.” 김 사장이 <올맨 브라더스>의 레코드판을 튼다. 점포 안이 추억의 올드 팝송으로 가득 찬다.

계속 가게 문을 열다
2000년대 초를 지나며 집마다 분리수거 물품으로 레코드판이 쏟아져 나왔고, 황학동에 그 많던 레코드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서울시 정책에 따라 송파 장지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와중에도 김 사장을 포함해 몇몇 점포주들은 문을 닫지 않았다. 어려웠지만, 레코드판 장사가 그들에게 준 특별함이 컸다. 그것은 ‘사람들’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워도 계속 열 수밖에 없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착해요. 불편한 마음이 생겨도 음악으로 게워내서 그런지 일반 사람들보다 굉장히 선해. 가게 들어오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그늘진 사람이 하나도 없어….”
김 사장은 관계의 힘으로 파리 날리는 점포를 지켰다. 돈은 잘 못 벌어도 사랑방처럼 드나드는 업자들과 이웃들이 늘 반갑고 소중했다.
인생의 즐거움을 주는 일터라는 얘기. 하지만 현실은 난감하고 막막했다. 돈이 많이 벌리는 일도 아니고 미래가 분명치도 않았기 때문. 그 즈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부터 복고, 레트로 열풍이 시작된 것이다.

남녀노소, 외국인까지
뱅뱅 도는 레코드판처럼 복고가 화려하게 돌아왔다. 얼마 전만 해도 촌스러웠던 것을 지금은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핫 템’이라고 여긴다. 레코드판을 사러 오는 연령층은 더욱 놀랍다. 추억을 그리는 높은 연령대는 물론이고 레코드판이 사라진 이후에 태어난 젊은 층까지 판을 사러 온다.
“복고풍 열풍과 노래 경연 예능 덕에 레코드판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어요. 옛날 노래를 기가 막히게 편곡해서 부르니까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었어?’하며 곡 원판을 찾는 거지. 외국인들의 경우, K팝에 반해 우리의 옛 노래를 직접 사러 오기도 해요.”
복고 열풍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미국음반산업협회가 지난해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스트리밍 사업 성장에서 가장 아날로그적인 음악인 레코드판의 성장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물리적인 형태를 갖춘 음반 자체를 소장하고 싶은 소비 심리가 크게 작용한 때문. 디지털 음반보다 가격이 더 비싼데도, 제품 수량이 한정적이라는 점에서 소장 욕구를 촉진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황학동 레코드가게 사장들은 레코드판의 특장점 중의 하나가 ‘힐링’의 아이템이라고 했다.
“사업 실패 후 우울증에 걸린 분이 있었어요. 이른 아침부터 가게에 와서 레코드판을 뒤적이다가 여러 장을 사 가곤 했던 분이죠. ‘이 좋은 걸 사람들이 왜 안 사지?’라면서 자신이 우울증을 레코드판으로 고치는 중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통 안 오시더군요. 우울증이 완치됐는지. 허허.”
이 밖에도 우울증을 털어버린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인가에 몰두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한 장년 남성의 경우, 이른바 ‘때려 부수는 음악’인 헤비메탈을 듣고 우울증을 치료하기도 했다. 병원에 입원한 단골이 병실에서 레코드판을 종종 튼 덕에 다른 환자들에게 마음의 약이 된 사례도 있다.

그때의 나를 만나
레코드판의 인기가 커지자 그로 인한 변화들도 이어지고 있다. 일단 귀한 몸이 된 레코드판의 구매는 황학동 같은 오프라인 구매처와 온라인 구매처 양쪽에서 가능하다. 구하기 힘든 물건일수록 검색과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하고 가격대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어렵게 구한 레코드판이 안겨주는 감성은 요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음질이야 최첨단을 달리는 디지털 음원을 능가하기는 힘들겠지만 ‘틱틱’ 튀는 레코드판 특유의 소리와 둥근 레코드판이 보여주는 시각적 퍼포먼스는 특별한 감성을 선사한다.
레코드판이 부활하면서 LP 플레이어도 함께 소환되었다. 깜찍하고 감성적인 제품이 많이 출시된 상태인데, 업계 사장들은 스피커와 플레이어가 붙어있는 일체형 LP플레이어 보다는 턴테이블이 달린 옛 오디오를 구매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황학동 레코드 점포에서 잠시 머문 시간은 옛 가수를 만나고 그 음악을 즐거워했던 당시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청계천의 물처럼 시원했다.

사진·글=김희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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