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여자 이발사 이덕훈 할머니

“나도 아버지처럼 이발쟁이 할래요.”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낭랑 18세의 소녀가 아버지께 도발하듯 한 마디를 질렀다. 당연히 여자가 무슨 이발사 일을 하느냐는 면박을 들었다.
“왜 못해요. 아버지가 하시는 거 나도 할 수 있다고요.”
아침은 보리밥, 점심은 거르기 일쑤고, 저녁은 시래깃국에 콩나물을 먹던 시절이었다. 소녀는 변함없이 주리고 궁핍한 하루가 너무 싫었다. 지긋지긋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돈을 더 버는 것뿐. 그래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순진한 소녀는 이듬해 성인이 되자마자 이발을 배우기 시작, 마침내 여성 최초로 이발사 면허 시험에 합격하는 주인공이 된다.

신세대 이발사에서 최고령 이발사
19세에 가위를 잡은 소녀는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전쟁과 혁명, 결혼과 출산 등 불가피한 상황이 아닐 때, 늘 가위를 잡았다. 사실 이덕훈 할머니(86세)는 어린 시절부터 이발 문화에 친숙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한 그해, 아버지를 따라 다시 북만주로 떠나야 했다. 부친께서 일제에 의해 군부대 이발사로 징용됐기 때문. 아버지는 조국이 광복할 때까지 이발 일을 하셨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따라 보건사회부 구내 이발소로 일을 다녔다. 몇 년 후 고대하던 이발사 자격시험을 치렀다. 한자 옥편을 찾아가며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다. 그녀를 포함해 여성 응시자가 4명이었지만 여성 합격자는 ‘이덕훈 양’뿐이었다.
김두한, 정주영의 머리를 깎다
그때부터 손에 꼽을 수도 없이 자주 이발소를 옮기면서도 억척스레 일을 했다. 종로와 남산 등 서울 곳곳을 누볐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유명인이 한둘이 아니다.
“김두한 씨는 검은 지프차에서 내리더니 이발 끝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어. 의자에 앉았는데 자리가 그냥 꽉 차. 정주영 회장은 목소리가 가느다랬는데, 돈을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지.”
야인시대와 경제개발 시대의 두 거물이 그의 손을 거쳤다. 중앙청의 고위 대작 등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인들이 그의 이발소를 찾았다. 그때마다 떨리거나 부담되는 게 당연.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지가 않았다.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떨려? 난 그냥 내 식으로 깎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와도 순서대로 깎았고 사람이 많다고 빨리 깎지도 않았어. 손님이 까다롭게 굴면 그냥 딴 데 가라고 했어.”
사실 이덕훈 할머니 역시 유명인사다. 각종 신문과 방송사 등 언론과 온라인 미디어에서 최초의 현역 여성 이발사로 조명을 받았다. 외신에서도 그녀를 소개한 바 있다. 최초 TV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독특한 카리스마를 뿜기도 했다. MC 손을 잡더니 지압을 하고 즉석 건강 진단까지 내렸다.
“살이 너무 쪘어. 이게 다 스트레스야. 오늘만 살면 되는데 왜 스트레스 받냐? 오늘만 충실하게 살면 되는데….”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확고한 스타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명랑 이발사’
이렇게 색깔이 분명한, 다소 까칠한 할머니지만, 이래봬도 별명이 ‘명랑 이발사’다. 할머니는 자신의 이발 솜씨와 입담 때문에 단골이 많다고 자신한다. 새이용원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처음 만난 사람의 손을 꽉꽉 잡아준다. 손끝이 맵다. 이윽고 사탕이며 야쿠르트를 건넨다. 그리고 수십 년 된 주전자에 물을 부어 봉지 커피를 끓여 주신다. 손님이 뜸할 때면 이발소 앞에 앉아 오가는 주민들과 찰진 대화를 나누신다. 연신 싱글벙글. 동안인 할머니의 미소가 빛을 발한다.
“단골이 참 많았지. 그런데 거의 다 하늘나라 갔어. 단골을 새로 만드는 중이야.”
이윽고 기억에 남는 분들을 한 분 두 분 열거했다. 그중엔 말년을 쓸쓸히 보냈던 서울대 출신 할아버지도 있고 일이 생기면 달려갔던 단골도 여럿이다. “여사님… 저 잣죽이 먹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는 1년 넘게 죽을 사서 홀로 병실에 누워 있는 단골의 영양식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자신의 손을 거친 유명인사들이 한 가득이지만, 그들보다는 자신을 찾았던 단골들에 대한 마음이 더 애잔하다. 할머니가 쓴 수많은 일기장엔 그들과 함께한 날짜와 장소, 주고받은 대화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굴곡진 아픔의 세월
가난한 집안의 장녀는 정말 억척같이 일을 했다. 그 돈으로 동생들을 건사했고 결혼을 해서는 남편과 시부모, 아들 넷을 위해 가위를 잡았다.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동. 일하고 집에 오면 물 긷고 밥 짓고 빨래하고. 상이용사였던 남편은 부상으로 벌이가 마땅치 않아 할머니의 이발업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래도 원망 없이 금실 좋게 살았다. 일 때문에 세심히 못 챙긴 아들 4형제도 제법 잘 자라줬다.
하지만 할머니의 가슴에는 깊은 멍울들이 있다. 젖먹이 딸아이를 가슴에 묻었고, 사랑하는 남편도 15년 전 교통사고로 잃었다. 장성해서 함께 늙어가던 아들도 셋이나 먼저 보내는 극한 슬픔을 맛봤다.
특히 자신을 많이 닮아 딸처럼 친근했던 셋째 아들의 죽음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다.
“어지간해야 눈물이 나오지. 이런 슬픈 사연들이 있지만, 남들한테 얘기를 안 해. 사연이 없는 것처럼 살아. 불평 없이, 그저 웃어가면서 일을 했어.”
끝내 눈시울을 붉히는 할머니. 자신보다 소중한 피붙이들과의 사별을 연거푸 겪었다. 그렇게 비통한 중에도 이발소의 삼색등은 쉼 없이 돌아갔다.
“누구를 원망해? 아니 불평을 왜 해? 그저 내 생에 일어난 일이야. 하나님께 원망해본 적도 없어.”
할머니는 요즘 부쩍 남편이 그립다고 했다. 그리고 먼저 간 자식들 생각도 매일 깊어진다. 그래서 늘 가까이에 그들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일하는 중에도 수시로 꺼내 보고 나그네 같은 손님한테도 보여주곤 한다.
“이 양반이 내 서방이고 얘들이 내 아들들이야. 잘~ 생겼지?”

나는야 최고의 이발사
할머니는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며 일을 해도 힘들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고. 그만큼의 노동은 커다란 성취감과 자신감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오늘도 해냈다. 오늘이라는 외나무다리를 잘 건넜구나’ 이렇게 자신을 격려하고 감사히 여겼다. ‘힘드시니 인제 그만 쉬시라’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핀잔을 날리신다.
“뭐가 힘들어.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이거 때문에 내가 살아왔는데 힘들긴. 나는 내일까지 일할 거야. 끝없는 내일까지. 하하. 손님들이 날 잊지 않고 소중한 머리를 맡겨주니 감사하지.”
긴 세월 고된 노동으로 한 평생 살아왔지만 아픔의 순간들이 있었을 뿐 결코 힘들지는 않았다는 이덕훈 이발사. 이발 일을 할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고, 그 덕에 신바람 나게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다고.
그는 강력한 자신감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본인에게 맡기지 않느냐며 자랑한다. 그런 자긍심을 가지고 150만 개의 머리카락을 정성을 다해 다룬다고 강조한다.
“이발하러 오는 사람들의 머리가 전부 다 달라. 똑같은 문제가 단 하나도 없어. 마치 수학 문제 같아. 그런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

힘들 때, 빗자루라도 잡아라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도 매일 새로운 문제들을 만난다. 수학처럼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여간해선 답안지를 내기 힘들다. 그런 손님들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이덕훈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건네는 말이 있다.
“오늘만 살아. 오늘 하루만 생각하라고.”
할머니께 여쭸다. 정말 아프고 어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힘들고 슬프다고 가만히 있지 말아. 가만히 있으니까 더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일어나서 뭐라도 해. 정 할 게 없으면 빗자루라도 들어. 쓸어낼 게 없어도 쓸어. 계속 움직여야 해. 그래야 뭐든 털고 일어설 수 있어.”
할머니는 기계처럼 사람 역시 쓰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자꾸 움직여야 건강도 찾고 사람도 찾아온다고.
“바쁜 건 괜찮아. 일이 없어 아무도 나를 찾는 이가 없을 때, 사람은 죽어가는 거야.”
이덕훈 할머니는 요즘 틈틈이 자신을 찾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래서 일기장을 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썼던 글을 조용히 낭독하기도 하고 또 볼펜을 들어 글을 짓기도 한다.
“…배고프면 식당에 가고 아픈데 없이 혼자서도 잘 살고 있는 86세의 노인, 소녀처럼 오늘만 잘 살고 있는 할머니 이발사,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할매 이발쟁이라고 한다…. 나에 대한 소개. 재밌게 잘 썼지?”
할머니는 처음 본 기자에게 속 얘기를 쉬 풀어 보이셨다. 솔직담백하신 할머니 현역 이발사의 매력 포인트다. 잠시 후 ‘삐거덕’하며 낡은 이발소의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이리 앉으셔.” 단골손님이 들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할머니. 그리고 이 한 마디로 가차 없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시간이 멈춰 버린 옛날 이발소를 나와 한적한 성북동 길을 걸었다. 걷는 내내 할머니 이발사의 한 마디가 계속 가슴을 울렸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게 가장 소중한 거야. 남의 것 부러워 말고 내가 가진 걸 보배처럼 생각해야 해.”

김희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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