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가족. 그런데 그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서로에게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한인 이민자 부부인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처음 정착했던 캘리포니아를 떠나 자녀들과 함께 미국 남부 아칸소의 시골로 오게 됩니다. 제이콥은 탁월한 병아리 감별사로 능력을 인정받았음에도 그 일에는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가 외진 촌 동네로 온 이유는 자신만의 농장을 일구겠다는 일념 때문입니다. 남편을 믿고 따라왔건만 트레일러를 개조한 집만 덩그러니 있는 걸 보고 아내 모니카는 망연자실하며 캘리포니아에서의 삶을 그리워합니다. 제이콥은 그런 아내를 달램과 동시에 딸 앤과 아들 데이빗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 있던 장모 순자(윤여정)를 불러들입니다. 그렇게 등장한 외할머니와 반기지 않는 손자 사이에 사소한 밀고 당김이 이어집니다.

영화 속 이어지는 대비
여기까지만 보면, 할머니와 손자 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소소한 드라마, 혹은 토종 한국 할머니의 미국 적응기가 전개될 것 같지요. 하지만 갈등은 그리 심하지 않고, 게다가 할머니 또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 의외로 잘 적응합니다. 몇 해 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던 모니카도 낯설어하는데, 순자는 잡초처럼 꿋꿋하게 버티지요. 참으로 역설입니다. 노력하는 자는 힘들어하는데, 별 노력 안 하는 사람은 속 편하게 지내요. 마찬가지로 아등바등 매달렸던 건 놓치는데, 그냥 놔뒀던 건 손에 쥡니다. 이런 ‘대비’가 영화 내내 이어져요.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물’. 하늘에 있는 구름이 ‘막연한 가능성’을 내포한 물이라면, 지상의 물은 ‘현실적인 결과’로 만들어진 물입니다. 가능성을 내포한 하늘의 물은 인간을 심리적으로 흔들어놓습니다. 하늘 가득 떠 있으면 우울하고, 없으면 오히려 평화로움을 느끼지요.
더 나아가 결과로서의 물은 인간사 속에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모든 문명이 강 주변에서 시작되었다시피, 인류 문명이 세워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물이죠.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물은 늘 위험합니다.
영화 속에서 ‘물’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내비치며, 제2의 연기자처럼 매 순간 등장합니다. 농장을 개척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물은 가족을 살리는 생명수이기도 해요. 그래서 제이콥은 물을 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허리케인이 다가오면서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물은 그의 가족을 집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시련을 던져줍니다. 살리기도 하지만, 고통을 주는 것 또한 물인 거예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제이콥이 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반면, 순자는 물을 찾아가요. 한 명이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재편하려고 한다면, 다른 한 명은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는 겁니다.

물은 흐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늘 움직이려 하지요. 떠나고 정착하고, 다시 떠나는 삶을 반복하는 게 인생입니다. 제이콥이 땅에 정착하려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은 ‘바퀴’가 달린 트레일러입니다. 정착이라고 선언하지만, 유목민으로의 정체성을 아예 버릴 순 없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제이콥 가족은 한국을 떠난 이민자, 즉 현대 유목민입니다. 영토화(territorialization)되어 있지만,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자기 고백인 셈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세기 12장 1절) 발전해왔던 게 인류고 우리 아니었던가요? 그렇게 안정성이 아니라, 불안함과 염려라는 위험부담을 안고 성장해왔던 겁니다.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늘 낯선 곳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족은 가장 믿을만한 구원처였지요. 그런데 사람이 그리운 아내 모니카는 구원의 희망을 가족 밖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비롯한 커뮤니티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노력해요. 반면, 이민 사회 속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듯한 남편 제이콥은 남을 안 믿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 믿으려 합니다. 그는 가족이 가족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거예요. 농장만 성공하면, 즉 돈만 벌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의 그 말은 가족이 가족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가족을 구원한다고 스스로 자백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가족을 떠나선 살 수 없는, 본질적으로 가장 가족적인 존재임에도 가족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합니다. 삶의 근원적 구조와 그걸 감당치 못하는 문화적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거지요.
그 중간에 할머니 순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위험한 건 안 보일 때 무서운 법이지 보이면 일단 괜찮으니, 위험할수록 보이도록 놔두는 게 좋다고 말이죠. 맞습니다. 실수나 약점, 갈등 등을 감췄을 때 문제가 되는 거지, 그걸 드러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됩니다. 제이콥과 모니카가 속내를 그대로 삼켰을 경우엔 불안이 갈수록 증폭되지만, 일단 꺼내는 순간 해소됩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솔직한 인물로 그려지는 순자는 누구를 구원하겠다는 오만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냥’ 살 뿐입니다. 물을 억지로 끌어와 성장하려는 제이콥의 농작물과 달리, 순자가 뿌린 미나리 씨앗은 물가 근처에서 조용히 자라요.

영화 속 캐릭터들이 뭔가를 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일은 더욱 복잡해지는 듯 합니다. 대신 그저 옆에 있어 주고, 더불어 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일로부터 해방되거나 타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기에 집에 들어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만약 전자라면 현대인은 스스로 서늘한 고독을 자초하는 것일 테지만, 후자라면 따뜻한 화목을 선택하는 거지요. 당신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입니까?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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