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른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두세 차례 힘껏 때렸다.
때린 것은 자기고 맞은 사람은 남인 것 같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자기가 남을 때린 것으로 여겨졌고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1902년 일본으로 건너간 24세의 중국 청년이 있었습니다. 몰락한 사대부의 후손인 루쉰(1881~1936)입니다. 서구화된 일본의 문명에 감탄하며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청년 루쉰에게 자신의 행로를 바꾸게 한 ‘환등기 사진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가 우연히 보게 된 한 장의 환등사진은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형당하는 중국인과 또한 그런 비극을 구경만 하는 중국인들의 표정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들은 청년 루쉰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서구 열강의 폭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늙어버린 중국’의 참담한 현실이 스쳐갔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문제는 ‘정신적 무능함’에 있음을 통감한 루쉰은 1906년 귀국해 작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메스’가 아닌 ‘펜’으로 중국의 개화(改化)시키겠다는 결의였고, 그 결의가 낳은 문학적 산물이 바로 <아Q정전>(1923)입니다.

청나라 말기 중국 남부 시골에 ‘아Q’라고 불리는 날품팔이가 삽니다. 마을의 유지인 자오 영감의 수하로 사는 아Q는 문맹인데다가 볼품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어 마을 아이들에게조차 조롱받고 구타를 당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을 때린 사람을 ‘자신의 어린 아들 놈’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 후 술집을 가거나 도박을 하러 갑니다.
작가 루쉰은 이런 아Q의 모습을 “그는 오른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두세 차례 힘껏 때렸다. 때린 것은 자기고 맞은 사람은 남인 것 같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자기가 남을 때린 것으로 여겨졌고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에게 받은 박대는 다른 형태로 표출됩니다. 그것은 자신보다 약자인 여성에 대한 완력행사였습니다. 아Q는 길을 가던 젊은 여승을 희롱하고, 여종에게 못된 짓을 시도합니다. 그러자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평판이 나빠진 아Q에게 더 이상 날품팔이 일감은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날품팔이가 없어 곤궁해진 아Q는 마을을 떠나는데 얼마 후 금전주머니를 옆구리에 찬 화려한 옷차림으로 돌아옵니다. 놀랍도록 달라진 의복과 표정에 놀란 마을사람들은 아Q를 다르게 대하는데 이로서 ‘돈’에 대한 위력을 실감한 아Q는 거드름을 피웁니다. 아Q는 도둑질하는 무리들을 도와 돈을 벌다가 발각되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비밀이 알려지자 아Q는 마을사람들에게 이전보다 더 심한 모욕을 받게 됩니다.

그때 아Q의 귀에 혁명의 소문이 들립니다. 혁명당이 마을에 들어올 거란 소문에 지주들과 관료들이 두려워하자 “혁명도 괜찮은 거구나”라고 여긴 아Q는 자신이 ‘혁명당’이라 자처하며 탐나는 것, 마음에 드는 여자들 모두가 자기 것이라 외치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런 아Q의 모습을 보고 공포를 느낍니다. 부자인 자오 영감조차 아Q에게 공손해집니다.
그런데 그 권력자 자오 수재의 집에 도둑이 들었고, 아Q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치안대장은 혁명당이 된 지 20일 동안 여러 강도사건이 발생했으나 해결하지 못하자, 상부의 책임추궁이 두려워 결국 아Q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취조관은 아Q에게 서류와 붓을 주며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서명을 ‘동그라미’로 표기하라고 압박합니다. 평생 문맹으로 살아와 단 한 번도 붓을 잡아본 적도 없는 아Q는 가슴이 뜁니다.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 순간 자신에게 사형이 결정되는 것도 모른 채, ‘동그라미를 잘못 그리면 취조관이 자기를 무시할지 몰라’하며 걱정합니다. 이윽고 제대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아Q는 만족합니다. 이로서 아Q의 사형은 결정됩니다.

작품은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열강의 약탈에 무기력하게 당하면서도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젖어있는 ‘아둔한 중국’을 아Q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을 조금 알게 되면서 “이 세상을 타락시키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지(無知)’가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무지(無智)’는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개의 ‘무지’가 작동할 때 이 대지는 ‘무법(無法)’이 됩니다. 불행하게도 아Q는 외부의 공격이 아닌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의해 파멸과 파괴를 동시에 맞이합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그대 비극의 원인은 오직 그대입니다”라는 대사는 진실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