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히 그림처럼 앉아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해내는 남자. 처음엔 다들 그저 수줍음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서려는 사람들이 더 많은 회사에서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구석을 지키는 모습은 왠지 속 깊고, 사람들을 말없이 헤아려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겼지요. 실제로 그는 동료를 잘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모진 말, 섭섭한 말 한 번 한 적 없고, 선배들에게도 공손하다는 평이 자자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에게 마음의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 속을 허심탄회하게 터놓기보다 항상 들어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팀원들의 고민상담소라 불릴 정도의 그였지만, 자기 고민은 깊을 대로 깊어져 휴직까지 고려하고 있었지요.

상담실을 찾은 그는 지금까지 회사에 들키지 않고 간신히 버텨왔지만, 더는 못하겠다고 쏟아냈습니다. 사람들과 사소한 대화를 하는 것도 힘들고, 함께 밥을 먹거나 커피만 마셔도 자신의 행동들이 관찰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불편하다 못해 불안을 느낄 정도라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부서를 옮기면서 프레젠테이션을 맡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더는 견디기 어렵게 됐다고 했습니다. 첫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여러 번 연습했음에도 사람들 앞에 나가는 순간 멍해져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몸살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그 뒤로도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지만, 남들 앞에 나서는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지고, 땀이 나고, 어지럽다고 했습니다.

이상심리학에서 사회불안장애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불편감을 심하게 느껴, 이런 상황을 회피하는 시도가 주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로 인해 사회적, 직업적 기능도 크게 지장 받게 되는데,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일을 수행할 때의 심한 불편감, 불안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사회불안장애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인지적 관점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공통적 특징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게 되지요. 타인의 호감과 인정을 받기 위해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는 마음속에는 자신이 실수라도 하면 거부당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타인이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내면에서 자신을 비판하고 깎아내리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다보니, 사람들과 함께할 때마다 불안과 거절감을 겪게 되고, 결국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는 상황을 회피해서라도 마음의 고통을 막으려 하는 것이지요.

그 남자는 불안 속에서도 두려움을 깨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집단상담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민감함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지요. 그 두려움이 처음 깨진 순간은 너무 허무했다고 합니다. 집단상담에 참여한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지를 먼저 빈 종이에 적은 후,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감 없이 들어보는 자리에서, 그의 추측은 단 하나도 맞은 것이 없었던 겁니다. ‘아, 내가 걱정하던 모습으로 나를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여태껏 나 혼자만의 걱정 속에 살았구나.’ 지금까지 어떻게 비춰질지 걱정하느라 구겨졌던 마음이 한순간에 펴진 순간이었다고 말하며 그는 환히 웃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삶이 흠잡을 데 없이 보이기 위해 애써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은 완성된 순간과 완벽한 순간들을 통해서가 아닌 것을요. 얽혀버린 스텝과 불안한 흔들림 속에서 생긴 구멍을 채워주고, 휘청거리는 서로를 받쳐주며 그렇게 사랑을 이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을 바라보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그 남자도 그 아름다운 비밀을 알아챘겠지요.

위서현
전 KBS아나운서.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의 힘>, <뜨거운 위로 한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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