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서공회가 펴낸 <대한성서공회사>에는 성경이 이 땅에 전해진 경위, 즉 번역과 전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을 따라 가보면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찾아 소개한다. <편집자 주>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 통치 노선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꾼다. 겉으로는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 조선 사람들의 삶은 나날이 힘들어졌다. 특히 농촌의 경우에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과 더불어 곡식을 심하게 수탈당했기 때문에 극심한 경제적 고통까지 겪었다.

예년에 볼 수 없는 풍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지는 듯하다. 총 곡식 생산의 80%를 차지하는 쌀 생산은 증가하는데 ··· 많은 농민이 자신의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만주에서 수입한 기장을 먹고 있다. 농가 부채는 날로 증가하고, 이들 중 다수가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 영국성서공회 1927년 보고서 중

농촌 경제 파탄은 곧 농촌교회의 위기로 이어졌다. 헌금도 줄어들고, 집회나 사경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성경의 경우 반포량은 늘어났지만, 권서들의 판매량은 격감하였다. 이로 인해 권서들은 경제적 문제, 곧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외국인의 도구”, “서양 사상의 선전꾼” 등의 욕설을 듣기가 예사였으니 많은 권서들이 다른 삶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꿋꿋이 지킨 권서들도 있었다. 1929년 영국성서공회 보고서는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매 거두리라는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뿌린 권서들”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전한다. 농촌에 관심을 가진 선교사들이 농촌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돌보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논의할 때(사진 아래), 농민과 호흡을 같이하며, 그들과 고통을 나누고, 교회의 짐을 함께 진 시골길의 권서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하나님의 교회와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삶을 헌신한 이들이 있었건만, 1930년대 후반에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거치며 일제의 조선말살정책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기관들이 강제 철수 당하였고, 영국성서공회는 ‘조선성서공회’로 발돋움하였으나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42년 5월 22일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적산관리령’을 내리고 조선성서공회도 그 모든 재산을 일제에 빼앗기게 되니, 성경이 찢기고 먹칠 당하며, 교회와 함께 고난을 겪었다. 더는 권서들이 활동할 수 없었고, 성경 반포사업도 전면 중단되었다. 또한 조선의 모든 교회가 ‘일본교단’에 편입되어, 이 땅에 ‘민족교회’는 자취를 감추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골길을 뚜벅뚜벅 걸었던 권서들의 정신과 삶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다. 성경이 훼손되고 어두운 창고 속에서 재고로 쌓여있을지라도, 그 내용을 읽고 익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권서들의 발자취가 지금-여기의 교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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