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다시, 봄 : 꽃 그림 선물하는 원은희 작가

그림으로 인사하는 여자
‘카톡’. 화면 가득 아름다운 꽃다발을 받는다. 꽃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원은희 작가. 카톡에 장문의 글을 쓰고, 답 글을 쓰면 꼰대라는 요즘, 그녀는 간단한 이모티콘으로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는 시대조차 앞서간다.
서울시 중구 예장동에 있는 개인 갤러리에는 그녀가 지금껏 그린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일 일기 쓰듯이 그림을 그리기에 그렇다. 꽃, 나무, 별, 물고기, 새, 동물들, 그리고 사람. 그녀는 보이는 것과 상상하는 것들을 그린다. 그림 속 사람들은 대개 눈을 감고 있지만 행복해 보인다. 왜 그런 걸까?
“눈을 감으면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꿈속에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자유잖아요?”
눈을 감고 여유롭게 꿈꾸는 것이 사치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원 작가의 그림을 보면 눈 감고 꿈을 꾸고 싶어진다.

봄, 발견하기
십여 년 전, 50대에 접어든 그녀는 대한민국의 중년 여성들을 보며 삶의 이유를 묻고 있었다. 프랑스어를 전공했지만, 자녀를 양육하며 엄마, 주부로 20년을 넘게 살다 보니 꿈 꿀 겨를이 없었다. 동네 체육관에서 몇몇 이웃들과 같이 운동하던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갱년기, 자녀들이 장성하자 몰려온 외로움. 그러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녀에게 선물처럼 봄이 다가왔다.
“동해바다 보러 같이 가지 않을래?” 함께 운동하던 친구들이 제안을 했고, 훌쩍 동해 묵호항으로 떠났다.
“바다에 가서 본 것들이 있어요. 해 뜨는 장면, 등대들, 월정사 석탑. 여행을 다녀온 뒤 작은 수첩에 낙서를 했어요. 별것도 아닌 그냥 끼적이는 낙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그린 그림을 보다가 ‘원은희, 너는 표현력이 다르네? 대단하지는 않지만 너만의 방법으로 그리네?’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림 속에서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지요. 그날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들에서 피던 동백꽃, 어느 날 불던 바람, 언젠가 내렸던 빗방울. 이런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죠. 2012년 쉰하나에!”
처음 그림을 그리고, 이듬해 5월에 첫 번째 전시회를 열만큼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나를 만나는 것”에 감격해 밤잠을 미루면서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것이 원은희 작가에게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50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봄을 맞이했다고나 할까?
“봄은 ‘발견’해야 비로소 봄이 되는 것 같아요.”
원 작가는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2012년 겨울의 낙서가 ‘그림 그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했을 때, 그녀에게 새 계절이 도래한 거다. 그래, 봄은 마냥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닌가 보다. 자신 안에 숨어있는 봄을 발견해내면 그 봄 속에서 사치로만 여겼던 ‘꿈’을 꾸게 된다.

봄, 살아내기
“매일 그린 그림을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보냈어요. 며칠 보내지 못할 일이 생기면 ‘왜 보내지 않느냐’며 재촉하는 분들도 생겼죠.”
갤러리 한쪽 벽에 걸린 큰 그림이 눈에 띄었다. 다른 그림들과 다르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여인. 그리고 노란 꽃들.
“자화상이에요. 아침마다 눈을 뜰 때 바로 앞에 걸어놨던 그림인데, 저 그림을 보면서 힘을 많이 얻었어요. 눈을 뜨고 있는 이유는, 세상을 바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꽃은 호박꽃이에요. 시골에서 자라면서 본, 나에게는 정겨운 추억이죠. 그리고 저 꽃은 결국 둥글둥글한 열매인 호박을 열게 해요. 꽃이 아름답고 예쁘지만, 그만큼 열매를 맺는 일도 중요하지요.”
꽃처럼 아름다운 꿈을 꾸고, 호박처럼 모나지 않은 열매들을 삶에서 맺는 것. 원 작가의 그림을 통해 꿈과 삶을 성찰해본다.

바야흐로 작가의 삶이 펼쳐졌다. 이제 그녀가 맺어야 할 삶의 열매는 ‘그림’이 되었다. 이런 삶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역설적으로 ‘삶’이 있었기에 열심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삶의 활력을 얻었지만, 살아야 하는 ‘삶’은 여전히 존재한다. 활동을 해야 하고, 견뎌야 할 일들이 있고, 견디지 않으면 무너질 수도 있는 ‘삶’ 말이다.
“제가 부자였으면 이렇게 열심히 그림을 그렸을까요? 매일 쇼핑하고 놀러 다녔겠지요.”
늘 따스함 속에서 봄을 만나는 것보다, 한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만나는 것이 더 감격적인 이유다.

할게요, 해 볼게요
“서울시립서북병원 간호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 그림 이야기를 병원에서 나누고 싶다는 거예요.”
요즘 원 작가는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 간호사들을 찾아다닌다. 호스피스 병동과 노인 치매 병동, 노숙자 폐결핵 병동을 운영하는 곳인데, 힘든 이들을 돌보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간호사들에게 ‘원은희의 그림 이야기’로 위로하는 <안아줄게요>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2013년, 우연한 기회에 서울발레시어터를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을 시작으로, 잠깐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그림을 그리고, 나누며 살고 있다. 자살예방캠페인에 참여하며 로비에 그림을 전시하고 강연자들에게 그림을 제공하기도 하며,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기적같이 많은 그림을 그리고, 기적같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혜택을 본 것은 바로 저예요. 그리면서 성장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나누면서 내가 충분히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빛날 수 있겠다는 응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게 되었죠. 한 번은 내 전시에 와서 울고 있는 학생을 보았어요. 전날 엄마가 다녀가셨고, 딸을 데리고 온 거였죠. 그림 제목이 <괜찮아>였는데, 그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거예요. 그만의 상처를 그림 한 점이 보듬어 줬겠지···, 아마추어리즘으로 살아가는 나를 응원하고, 나를 사랑한 그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가 만나고, 살고 있는 봄은 이제 다른 누군가를 봄으로 초청하는 일이 되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요. 그림을 통해 꿈을 꾸는 저에게 잘 어울리는 기도죠. 이 기도는 ‘할게요’, ‘해 볼게요’로 시작해요.”
눈을 감고 꿈을 꾸지만,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실 속에서 두 눈을 바로 뜨고 그림 그리는 작가. 그녀가 삶으로 외치는 ‘해 볼게요!’가 봄을 찾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란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제게 항상 ‘처음’이에요. 매번의 그림이 ‘새것’이죠. 어디까지 갈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참 잘했어’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매일이 다시 봄이다.

사진·글=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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