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가 전쟁에 휘말리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이웃 국가들로 쏟아져 들어올 때였다. 인근 국가 정부는 난민들이 무방비로 흩어져 사회 문제를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국경 인근에 난민 캠프를 많이 설치했다. 국제기구들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열악한 곳도 많았다. 뜨거운 열기를 피할 건물은커녕 식량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전쟁이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열악한 환경도 마다않고 견디던 난민들은 전쟁이 길어지고 돌아갈 날이 점점 막막해지면서 많이 지쳐갔다. 그중에 어린이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교육도, 보건혜택도 제공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식사를 대접하고 위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식사는 터널의 끝을 모를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작은 쉼터 같은 역할이었다.

저녁 식사 초대
한번은 6명의 자녀가 있는 가족을 초대했다. 아이들은 한두 살 터울로 모두가 어렸다. 그중 가장 큰 딸인 마리아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입을 전혀 열지 않았다. 말만 안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초점도 없었다. 어둡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러나 부모는 마리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도 묻지 않았다. 전쟁의 땅에서는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진다. 파렴치한 사건들도 많이 일어난다. 그런 상처를 가진 이들에게 그 상처를 되뇌게 하는 것은 또 한 번 고문을 가하는 것과 같아서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이곳 사람들이 서로 지키는 무언의 약속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과를 꺼내놓고 프로젝터를 설치하여 영화를 틀었다. 아랍어로 더빙된 예수영화였다. 아이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자기가 알아듣는 말로 대화하는 것이 신기했는지 킥킥 웃기도 하고 재잘거리며 영화를 즐겼다. 그러나 마리아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만 바라보며 외톨이로 앉아 있었다. 3시간 가까운 분량의 영화는 이내 아이들을 잠들게 만들었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배불리 했으니 식곤증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들은 음성
그러나 마리아는 잠을 자지도, 영화에 집중하지도 않고 그 긴 시간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마리아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들짐승처럼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마리아의 엄마는 마치 이전에도 많이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속말을 속삭이며 안정시키려 애썼다. 동생들도 잠에서 깨어 마리아를 바라봤으나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많이 겪었던 일이라는 듯이 엄마의 품에서 한참 몸부림을 치던 마리아는 웅얼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리고 이내 방 안의 모두가 알아들을 정도로 말소리가 커졌다.
“예수님이 제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몸을 떨며 스크린에 비춰지고 있는 영화 속 예수님을 가리켰다. 말을 하지 않던 마리아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의 상태에만 모든 신경이 가 있어서 시간이 지나고 마리아가 안정을 되찾아 모두가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그녀가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도 마주칠 줄 알고 얼굴의 긴장도 풀어져 있었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엄마에게 무슨 말인가 계속 떠들어대는 것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충격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였다.
마리아는 영화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그 말씀들이 그녀의 마음을 찌르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치료의 경험을 한 모양이다. 마리아는 영화 속 장면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라 어두웠던 기억의 숲에서 걸어 나왔다. 영화가 끝나면서 그녀는 어떤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박태수
C.C.C. 국제본부 총재실에 있으며, 미전도종족 선교네트워크 All4UPG 대표를 맡고 있다. 지구촌 땅 끝을 다니며 미전도종족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땅 끝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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