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기다림'

부모의 기다림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성경 속 탕자의 비유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중 자기 몫을 먼저 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먼 나라에 가 탕진하고 결국 굶어 죽게 된 지경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되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매일 동구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고 귀한 아들로 대접한다는 내용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고, 온전함을 회복하게 될 것을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기다림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국어사전의 정의대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만, 그 시기와 내용을 내가 정하지 않고, 상대의 ‘적절한 시기’에 맞춰서 뒤로 미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믿고 기다려줄 때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장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있어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신뢰하고, 기다려주는 등 조건들이 적절히 갖추어진다면 무한한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상담 현장에서 만난 많은 사례를 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에게 알맞은 성장 속도와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며, 부모나 선생님 등 주변 어른들이 믿고 기다려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준수 이야기
준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나를 찾아왔다. 준수를 만나기 전에 만난 엄마 말에 의하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까다로운 기질로 잠도 없고 울음 끝이 길며 고집 세고 말썽을 부리는 등 엄마에게 ‘세상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 불행한 곳인가를 알려주려고 태어난 아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이를 마구 때렸다고 했다. 반면 연년생인 동생은 ‘세상이 얼마나 행복한 곳인가를 알려주려고 태어난 아이’라고 표현해 동생에 대한 편애가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했다.
자녀의 문제는 부모에게서 유래하는 일이 대부분이라서 자녀의 문제를 치유하는 동시에 적절한 양육 방법을 알리기 위한 부모 상담을 진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부모의 원 가족, 현 가족의 문제를 파악하고 다루게 되는데, 준수 엄마는 부모 상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결국 아이만 만나게 되었다.
준수는 학교에서 힘으로 모든 문제 해결을 하고 있었고, 동생을 죽이고 싶다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놀이치료 회기의 대부분을 전쟁을 주제로 하였으며, 마음대로 안 되면 자기 통제와 조절이 안 되어 폭력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0회기쯤 되었을 때 갑자기 놀이양상이 바뀌어 차분하고 안정적이며 자기조절이 가능해졌으며, 치료자에게 감사와 신뢰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15회기가 되었을 때 엄마가 찾아와 아이가 너무 달라졌는데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했다.
준수 엄마는 성장 과정에서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와 오빠를 경멸하고 미워했는데, 자신의 아들이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것을 두려워하여 준수를 믿고 기다리지 못하여 체벌하며 조급해했던 것이 준수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후 준수는 싸우는 아이의 이미지를 벗고 학교 임원에 선출되는 등 봉사와 책임감을 키우며 또래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였다.

올바른 기다림
올바른 기다림의 모습을 확연히 보여준 영화는 <호스 위스퍼러(The Horse Whisperer)>이다. 호스 위스퍼러란 고향을 떠나 낯선 환경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향수병에 걸린 말과 소통하며 향수병을 고쳐주는 치료사를 일컫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출세와 성공에만 집중해 딸에게 관심이나 애정을 주지 못한다. 어느 날 딸은 부모에게 쌓인 화를 삭이려 겨울 새벽 위험한 승마를 하다가 대형 사고를 당하여 한쪽 다리를 잃게 되고, 부모 사랑을 대신했던 애마는 중상을 당한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두려움에 사나워진 딸과 말을 호스 위스퍼러가 함께 치료하는 스토리다.
두려움과 불신에 가득 찬 말을 기다리는 호스 위스퍼러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는 말이 두려움을 조절할 수 있을 만한 거리를 두고, 조급하게 다가가거나 빨리 돌아오라고 강요하지 않고 상처 입은 말의 심리적 거리와 속도에 맞춰 아주 긴 시간을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너를 사랑한다, 네가 돌아올 것을 믿는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언제라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만히, 오랫동안, 눈을 마주 보고 마음으로 교감하며 미동도 없이 기다린다.
치료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자리, 같은 아픔을 함께 경험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치유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자가 된다. 상처 입은 사람이 치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 받은 경험자가 치유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나의 방향과 속도로 끌고 오거나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기다리며, 아이는 처음으로 엄마 역할을 하는 서투른 엄마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성애와 그 능력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사랑의 모습, 부모 자녀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전혜리
가정 내 문제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 생긴 문제의 연속임을 보며 아동, 청소년상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복수전공하며 놀이치료와 부모-자녀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연세다움상담코칭센터 원장으로 매체(놀이치료, 미술치료, 모래놀이치료, 음악치료, 독서상담 등)를 통한 상담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