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농부에게 어떻게 했느냐?
저는 다만 그 농부에게 풍요를 주었을 뿐인데요


어느 날 문득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인 김승현의 <납>을 읽으며 순간 ‘그래, 맞아’ 감탄이 나왔습니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 나는 나의 짐이다 / 내속에는 아마 납덩어리가 들어 있나보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거대한 바위도, 철광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욕망과 탐욕을 품고 사는 자신’, ‘오해와 분노를 담고 있는 자신’보다 무거운 것은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 안에 비축해놓은 야망, 위선 같은 삶의 불순물들이 납덩어리가 되어 일상을 무겁게 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러시아 민속에서 전해지던 구전을 자신만의 철학과 색깔을 입혀 날카로운 필치로 담아낸 ‘톨스토이의 단편집’ 중 <작은 악마와 빵 조각>도 이런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철학적 우화입니다.

어느 시골에 소박하고 정직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농부는 아침도 먹지 않고, 점심으로 빵 한 조각만을 준비한 채 밭으로 나갑니다. 일을 하다 농부는 점심을 먹기 위해 빵을 놓아둔 곳으로 갑니다. 그런데 빵이 보이지 않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동안 작은 악마가 몰래 훔쳤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이제 저 농부가 화를 내고 욕을 해대겠지”라며 주시합니다.
그러나 농부는 “설마 한 끼 안 먹는다고 굶어 죽기야 하겠어? 누가 훔쳐갔다면 꼭 필요해서 가져갔겠지”라며 곧 우물물을 마신 후 다시 밭을 갑니다. 작은 악마는 충격을 받고 큰 악마에게 이 사실을 고합니다. 큰 악마는 작은 악마에게 “만약에 농부들과 그들의 부인들까지 그런 태도를 갖게 되면, 우리들은 할 일이 없어져서 살아갈 수가 없을 거야”라고 책망하며, “만약 3년 안에 그 농부를 이기지 못한다면, 너를 성수(聖水) 속에 처박을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후 작은 악마는 성실한 사람으로 둔갑하여, 농부의 집 머슴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파종할 봄이 되자 농부에게 “올 여름에 가뭄이 들 것이니 습지에 씨앗을 뿌리세요”라고 말합니다. 습지에 파종하면 씨가 썩을 것을 알지만 농부는 머슴의 말대로 합니다. 그런데 여름이 되자 정말 가뭄이 오고 다른 농부의 농작물은 말라죽는데, 농부 밭에서만 이삭이 잘 자라 풍작이 됩니다.
1년이 지나 다시 씨를 뿌릴 때가 되자, 악마는 농부에게 “이번에는 언덕 위에 씨를 뿌리세요”라고 말합니다. 언덕에 파종을 하면 새가 와서 씨를 먹을 것이고, 또 바람이 불어 씨가 날아갈 위험이 있는데도 농부는 머슴의 말대로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비가 많이 내려 다른 집 농작물들은 비를 맞아 썩었지만, 농부의 곡식들은 잘 자라게 됩니다. 가을이 오고 많은 곡식을 수확한 농부가 “이 많은 곡식을 다 어쩌지?”라고 근심하자, 악마는 “밀을 빻아 술을 담그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농부는 술을 만들고, 작은 악마는 큰 악마를 데리고 와 농부의 삶을 보여줍니다.
두 악마가 본 농부의 삶은 이러했습니다. 농부가 부유한 마을 사람만 초대해 술을 마시는데, 농부의 아내가 술을 가지고 오다가 술병을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러자 농부는 “이게 얼마짜리 술인데 엎질러?”라며 분개합니다.
이어 이웃의 가난한 농부가 그 집에 들어와 술을 요청하자, 농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에게나 내 귀한 술을 먹일 수는 없지”라며 거절합니다. 큰 악마는 이런 농부의 변신에 만족해합니다. 작은 악마는 “잘 지켜보세요.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요. 지금은 저 놈들이 여우처럼 꼬리를 흔들며 서로 속이고 있지만, 조금만 더 먹으면 사나운 늑대처럼 변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진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칭찬하더니, 얼마 후에는 서로 욕설을 하고 싸움을 합니다. 이 모습에 큰 악마가 만족하자, 작은 악마는 “좀 더 지켜보십시오. 술을 좀 더 먹으면 돼지처럼 변해버릴 것입니다”라고 했고, 술에 취한 사람들은 구토를 한 채 뒹굴며 잠이 듭니다. 이 모습을 본 큰 악마는 “참 잘했구나, 그런데 어떻게 했느냐? 저 술에 무엇을 넣은 것이냐?”라고 묻자, 작은 악마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어요. 다만 저 농부에게 곡식을 풍요롭게 해 주었을 뿐이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착했던 농부가 이제 술 한 잔조차 가난한 이웃에게 대접하기 인색한 ‘굳은 농부’가 된 처참한 말로가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풍요’가 때로 불행의 제 1조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작가는 ‘준비되지 못한 자’에게 주어진 부(富)와 권력이 위험한 재앙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문득 작가 톨스토이가 작품 속 농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대개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의 이름을 명시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그 까닭이 농부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대입(代入)시켜 읽어 보라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요? 다시 말해 우리들도 그 농부처럼 풍요로워지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따끔한 경고를 던지는게 아닐까요?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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