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지친 가족들에게

“왜 엄마는 똑같은 말만 해?”
“얘, 너는 안 그런 줄 아니?”
부모자식 간에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이자 빠지지 않는 인생 대사이다. 이들은 서로를 질문으로 비난하고 내용으로 변화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를 지적하는 이들의 말투는 어찌나 똑같은지!
길들인다면 상대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오후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행복해 질 것이라는 말.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이다. 길들인다는 것은 어떤 일에 익숙하게 된다는 뜻이다. 살아가면서 가족은 표정, 말투, 몸짓과 걷는 모양까지 닮아가게 되는데, 무엇보다 ‘오랜 말투’는 서로의 행동을 예측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어서 부모의 말끝이 올라가면 아이들은 작전이라도 하듯 각자의 방으로 사라진다.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싸우며 변화해 가고, 그 과정에서 무의식으로 닮고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사실 길들여져야 서로에게 유연하게 쓰이는 터라, 부모 자녀는 서로 닮은 관계가 되며 점점 편안해진다.

부모와 자녀의 길들이기
우리 속담에 ‘팔자는 길들이기로 간다’(습관이 천성이 되어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말을 보면 어쩌면 부모의 오랜 ‘길들이기’가 아이 천성의 모자이크가 되어 자녀 일생에 나타나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는 말의 조각칼로 자녀의 좋은 행동을 만들고, 감정의 사포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간다. 그렇게 자식의 성품은 부모 감정의 사포로, 성숙한 행동은 말의 조각칼로 이루어진다. 부모가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커가는 아이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알려 사회화를 돕고, 조언이라는 명분으로 성장한 자녀들에게 사회적 위험과 혜택을 살피는 힘을 얹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부모만 자녀를 길들일까? 아이도 울음으로 부모의 행동을 길들이고, 웃음으로 시선과 감정을 길들인다. 아이의 유치원과 초중고 시절 등하교 시간에 부모의 일상 시계가 맞춰진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부모의 오랜 성인기 모습을 복붙(복사하여 붙이기)하듯 음성과 몸짓, 체형에 습관까지 유사한 세월을 되풀이한다.

사회적 길 만들기
자녀의 인생 진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면 이전의 상호 길들이기가 ‘사회적 길 만들기’로 이어진다. 부모가 자녀와 나누었던 대화방식과 감정교환방식, 표정 짓기와 관계 맺기 방식으로 상호 길들이기는 자녀의 인생 길 만들기의 중요한 재료가 된다. 인간관계의 방식과 영역, 그리고 직업선호에 이르기까지 부모를 통해 길들여진 아이는 친구를 결정하고 연인을 구별하며, 적성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동창회를 나가고 사랑을 나누며 직업을 택할 쯤 되면, 거울 앞에 어디서 오랫동안 본 것 같은 사람들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사진과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정말 엄마 닮았다!’ ‘아빠랑 진짜 안 닮은 줄 알았는데!’라며 힘센 유전의 힘을 확인하고 강력한 길들이기의 결과를 보게 된다. 아버지 같은 목소리에 아버지 친구들 같은 친구의 숫자들이 생겨나고, 어머니 같은 웃는 표정에 어머니 비슷하게 코 푸는 소리가 난다. 붙어있는 단어처럼 붙어살며 ‘길들이고’, 성장하여 떨어져 살기 시작하며 길들여진 모양으로 ‘길 만들기’를 시작한다. 가족은 분리된 두 유전으로 시작하고, 분리를 시작하며 길들이기로 완성된다.

길들여지며, 길을 만들며
부모는 아이의 영아기,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육자로, 양육자로, 훈육자로, 격려자로, 상담자, 그리고 동반자로 살아간다. 그 과정에 아이는 부모와 함께 신뢰를 배우고, 독립을 배우며, 경계와 울타리를 알고, 회복탄력성을 익히고, 스스로의 한계를 알아가며, 친밀한 사랑의 방식을 알아간다. 그 사이 부모는 희망을 꿈꾸고, 의지를 다잡으며, 목적에 충실하고, 힘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며, 변수를 다루는 지혜를 얻고, 인내와 좌절도 배워나간다. 그렇게 오랜 세월 가족은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가르치는 학습자-교습자로 살아간다. 길들여지는 학습자이나 길들이는 교습자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부모님의 사랑을 압니다’라고 말하고, ‘아이가 오히려 저를 키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러니 육아에 지쳐간다면 생각해보자. 아이는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이후에 이전 사진들을 살펴보자. 그리고 기억하자. 우리는 지금도 길들이며 길들고 길들여지며 길을 만들고 있다.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이자 한국노인상담센터장. 상담전문가이자 부모교육전문가로 활동중이며 나이들어가며 필요한 것들과 어른의 역할에 대한 글을 주로 쓴다. <나이들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법> <가족습관> 등을 썼으며 <이호선의 나이들수록>을 글로 쓰고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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